한가하여라, 산빛·물소리에 저녁 가고 아침 오니

유불선이 공존하는 암자 계룡산 금용암

등록 2008.04.18 16:02수정 2008.04.18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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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용암 가는 길.
금용암 가는 길. 안병기
금용암 가는 길. ⓒ 안병기
움직이는 비애와 움직이는 비애 덩어리인 나
 
고왕암을 나와서 비를 맞으면서 산길을 내려간다.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이렇게 시작되는 김수영의 시 '비'가 떠오른다. 비를 "움직이는 비애"라 한 것은 아주 절묘한 표현이다. 움직이는 비애를 맞으면서 움직이는 비애 덩어리인 내가 걸어가는 셈이다.
 
그러나 나의 비애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길 왼편 계곡, 제법 웅장하게 생긴 폭포들 때문이다. 폭포 바위들에 부딪혀 깨어진 물줄기들이 일으키는 물보라가 내 비애를 부숴버리고 만다. 내가 아는 한 고왕암에서 금용암 앞에 이르는 계곡이 계룡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 아닐까 싶다.
 
이윽고, 길 좌측에 푸른 대숲이 나타난다. '움직이는 비애'를 맛본 대나무들이 유난히 푸르다. "그렇구나. 비애의 색깔은 이렇게 푸른 것이었구나"라는 깨달음이 퍼뜩 뇌리를 스쳐간다. 영양가라곤 별로 없는 깨달음이다. 대숲이 나타난 걸 보면 금용암에 거의 다 온 것이다.
 
 금용암 전경.
금용암 전경.안병기
금용암 전경. ⓒ 안병기
 
금룡암은 신원사의 부속암자이다. 암자 옆엔 수려한 계곡이 흘러가고 있다. 암자 윗쪽 계곡엔 꽤 깊은 소(沼)가 있다. 금용암이란 이름은 거기서 금색용이 나왔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이름에서부터 무속신앙의 냄새가 물씬 나는 절이다.
 
이 절이 언제 생겼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겐 계룡산 암자 가운데 가장 정감이 가는 곳이다. 가을에 오면 무슨 나무 열매 같은 것을 따다 담는 광경이라든가 대대적으로 시래기 따위를 말리는 풍경 등을 볼 수 있는데 그런 사소한 것들이 마치 고향집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왼쪽으로 길을 꺾어지자, 금용암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웬걸. 굴뚝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가 암자를 감싸고 있는 게 아닌가.
 
윤광준씨와 함께 했던 '똑딱이'의 추억을 떠올리다
 
 사진을 찍기 위해 공양 짓는 과정을 보여주는 지혜 스님.
사진을 찍기 위해 공양 짓는 과정을 보여주는 지혜 스님. 안병기
사진을 찍기 위해 공양 짓는 과정을 보여주는 지혜 스님. ⓒ 안병기
 다시 한 번 자세를 취해주는 지혜 스님.
다시 한 번 자세를 취해주는 지혜 스님.안병기
다시 한 번 자세를 취해주는 지혜 스님. ⓒ 안병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걸음을 재촉해 도착하니, 스님이 가마솥 옆에서 일하고 있고, 그 앞 요사 처마 아래엔 네 사람이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일단 사진부터 찍고 나서 볼 일이다.
 
커다란 DSLR 옆에서 '똑딱이'로 사진을 찍으려니 영 쑥스럽고 폼이 나지 않는 것 같다. 몇 년 전이었던가. <잘 찍은 사진 한 장>이란 책을 쓴 윤광준 씨 등 10여 명의 여행작가들과 함께 남해군의 초청을 받아 남해군 내 여러 명소를 찍던 때의 일이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다 DSLR를 들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나와 윤광준씨만 '똑딱이'로 사진을 찍고 다녔다. 카메라에 문외한인 나야 그렇다 치자. 그러나 윤광준씨는 왜 굳이 '똑딱이"로 사진을 찍었던 것일까. "사진 잘 찍는 사람은 뭔가 다르다"라는 비아냥 섞인 소릴 듣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윤광준씨는 작품 사진을 찍을 것도 아니면서 터무니없이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건 낭비라는 생각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낭비 없는 소비, 낭비 없는 감정, 덜어낼 것도 더할 것도 없이 금도 있는 처신. 내가 암자를 순례하면서 배우고 싶은 것들이다.
 
부산스러웠던 사진 찍기가 끝나자, 스님에게 물었다. "지금 무슨 사진을 찍은 거냐"라고. "암자 소개 앨범에 넣을 사진"이라고 대답한다. 나 또 무슨 사찰 음식 만드는 사진을 찍나 했더니만….
 
맑은 노래 어느 누가 나처럼 들을쏘냐?
 
 '금용동천' 전각.
'금용동천' 전각. 안병기
'금용동천' 전각. ⓒ 안병기
 
 '금용동천' 전각 뒤편으로 흘러가는 계곡.
'금용동천' 전각 뒤편으로 흘러가는 계곡. 안병기
'금용동천' 전각 뒤편으로 흘러가는 계곡. ⓒ 안병기
꼭 일 년만에 이곳에 온 것 같다. 그동안 얼마나 변했는지 암자 구석구석을 둘러본다.
 
금용암 경내 끝에는 매우 특이한 전각이 있다. 바로 '금용동천'이란 현판을 단 전각이다. 용왕을 모시는 전각이라는데, 그렇다면 '동천(洞天)이란 또 무엇인가. 동천이란 신선이 사는 곳이다. '금용동천' 전각은 불교와 도교가 행복한 만남을 꿈꾸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엔 일체의 부처를 모시지 않고 뒤쪽 계곡을 향해 열린 투명한 유리창만 있을 뿐이다. 마치 적멸보궁처럼 불상을 모시는 자리를 비워둔 것이다. 용 그림과 칠성탱화와 산신 탱화가 모셔져 있긴 하지만.
 
용은 물의 세계를 대표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물에 살지만 비상하는 동물이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용은 동물에서 신적인 존재로 바뀐다. 불교에서는 미륵신앙을 가리켜 용화(龍華) 사상이라 한다. 미래불인 미륵불이 도솔천에서 용화수(龍華樹) 아래로 내려와 3번 설법한다는 것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용을 모신다는 건  미륵이 모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각을 나와 계곡으로 다가간다. 계곡엔 꽤 장대한 폭포가 있다. 저 폭포 아래 소를 두고 '용왕성지'라 부르는 모양이다. 계곡 바위엔 '용궁성지임 출입금지"라 쓰인 표지판이 걸려 있다.
 
언제 보아도 이곳의 계곡물은 꺠끗하고 물소리는 청아하다. 진각국사 혜심이 머물렀던 오봉산도 이같은 풍치를 지녔던 것일까.
 
오봉산혼미취(五峰山昏彌翠)  오봉산 산빛은 저물수록 푸르고
일대계성효갱고(一帶溪聲曉更高) 한 줄기 계곡 물소리는 새벽이면 더욱 카지네
모거조래성색리(暮去朝來聲色裡) 물소리, 산빛 속에 저녁 가고 아침 오니
청가수득이오조(淸歌誰得以吾曺) 맑은 노래 어느 누가 나처럼 들을쏘냐? -<무의자시집>에서
 
수선화 꽃 속엔 하심이 없다
 
 종무소 앞에 핀 금낭화와 수선화.
종무소 앞에 핀 금낭화와 수선화. 안병기
종무소 앞에 핀 금낭화와 수선화. ⓒ 안병기
종무소 뜰엔 5-6월이나 되어야 피어나는 금낭화가 벌써 피어나 있다. '며느리주머니'란 재미있는 별칭을 가진 꽃이다. 현대말로 옮기자면 '며느리 비자금 주머니'쯤 되지 않을까. 며느리가 가진 부의 척도이기라도 하듯 주머니가 많이 달릴수록 더욱 화려한 맵시를 뽐낸다.
 
그 아래엔 수선화가 피어 있다. 수선화의 속명은 '나르시소스'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소스라는 청년의 이름에서 비롯한 것이다. 연못에 비친 자기 얼굴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물 속에 빠져 죽었는데 그 자리에서 수선화가 피었다는 게 나르시소스의 전설이다. 그래서 꽃말도 '자기애'이다. 자기애 혹은 왕자병을 가진 사람에겐 자기를 낮추는 하심(下心)이 없다. 어쩌면 절집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가장 멀리 해야 하는 꽃이 아닐까 싶다.
 
대웅전과 산운각을 둘러보고 나서 암자를 나서려는데 아까 그 스님이 손짓해 부른다. 다가가니, 바나나와 사탕 따위를 듬뿍 안겨준다.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받아 배낭에 넣는다.
 
실례를 무릅쓰고 법명을 물었더니 지혜 스님이라고 알려준다. 마곡사에서 득도한 지 이십 년이 넘었다고 한다. 금용암에 대한 기사를 쓰게 되면 알려주려고 "혹시 인터넷을 할 줄 아느냐""라고 물었더니만 사방을 살피더니 모기만한 소리로 대답한다. "난 할 줄 안다"고. 아마도 암자의 큰 스님이 인터넷 하는 걸 싫어하시나 보다.
 
어쨌든 스님의 수줍음이 참 보기 좋다. 자기를 낮추는 하심 속엔 저런 수줍음도 들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묘하게 하심을 가장한 교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즘 큰 절에 가면 저런 하심을 지닌 스님을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전각이 커지면 마음이 덩달아 교만해지는 것이 인간의 맹점인지도 모른다. 초심을 잃지 않으려면 규모에 맞는 살림 살이를 꾸려야 하는 건 세간이나 출세간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신원사에 다 왔다.
 
가만 있자. 내가 그 무겁던 비애를 어디쯤에다 내려놓고 왔던가.
 
 대웅전.
대웅전.안병기
대웅전. ⓒ 안병기
 
 산신을 모신 산운각.
산신을 모신 산운각. 안병기
산신을 모신 산운각. ⓒ 안병기
2008.04.18 16:02ⓒ 2008 OhmyNews
#계룡산 #금용암 #용화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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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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