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 회원과 서울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몰점을 점거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난해 7월 10일 오전 서울 마포구 창전동 이랜드 본사 앞에서 이랜드 비정규직을 위한 예배를 열고 있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성경에 노조가 없다"는 박성수 이랜드 회장의 말은 참신했다. 또한 강력했다. 말 한 마디로 진보적 시민사회에서 여러 해 동안 노력해 쌓아온 문제 의식을 대중적으로 환기시키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상식을 거스르는 저 발랄한 교조주의는 과거 비정규직 문제에 별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달아올라 덤벼들게 만들었다.
덕분에 이랜드 비정규직 투쟁에는 전에 없이 많은 사회적 관심이 쏟아졌다. 노동 문제를 바라보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대의 반개신교 정서와 맞물려 공감대가 형성된 덕이었다.
물론 문제의 주장이 "성경에는 비정규직도 없다"는 빤한 말로 애틋하게 무력화됐어도 그 물렁한 아름다움은 오래 남아 가슴을 적셨다. 도를 지나친 무지와 무식과 무념은 때때로 그토록 참신하고 강력하다. 그렇게 작년 여름은 십자가 아래에서 뜨거웠다.
중요한 가치들이 시장·실용·현실의 이름으로 희석되고 있는 이명박 시대어쩌면 그것은 애초 하느님의 권능에 기반을 둔 폭력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당시 사측은 '불법파업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노동조합원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현장으로 복귀하여 다시는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의 달란트에 불만을 갖지 않은 성실한 종의 소임을 다 하도록'이라는 기도 내용을 이랜드 전 직원들에게 전파했다.
하지만 다음날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홈에버에서 최소한의 권리를 요구하던 이들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낸 건 하느님이 아니라 공권력이었다. 진압 시작 40분 만에 농성자 전원을 연행하는 초강수였다. 공권력을 움직인 건 정권의 원칙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장의 원칙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말했다. 공권력은 시장의 이해관계에 의해 작동했고 노동자들은 시종일관 촛불처럼 위태로웠으며 돕고자 하는 이들은 반개신교 공기에 위탁하지 않고선 힘을 얻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정의란 대체로 무심한 것이었다.
해가 바뀌고 상황은 더욱 불리해졌다. 이명박 정권은 '마켓 후렌들리'를 하다못해 그 자체로 하나의 시장 같아 보인다. 대통령은 7퍼센트의 경제 성장과 60만개의 일자리 창출을 공약하는 동시에 노동시장 유연성을 강조했다. 결국 싼 값에 원칙 없이 착취하다가 언제든지 잘라 없앨 수 있는 일자리 60만개라는 이야기다.
총선에서도 비정규직 규모를 줄이거나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각 정당의 공약들만 난무할 뿐, 뭘 어떻게 고칠지에 대해선 말이 없었다. 비정규직 철폐라는 말을 꺼낸 건 그나마 진보정당 밖에 없었다. 이명박 정부 시대의 공기라는 게 그렇다. 우리 삶의 중요한 가치들이 시장과 실용과 현실의 이름으로 희석되고 있다.
새 정부의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어떤 형태의 노사 갈등에도 정치적 해결을 위해 정부가 개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중재자로서 정부 역할을 부정하겠다는 말이 한 나라 노동부 장관의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초현실이 원숙한 실용으로 치부되는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언뜻 자발적인 기도 은폐와 이성 마비가 여러 모로 실용적일 것 같다는 생각에 닿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이명박 정부를 비롯해 그와 유사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자들의 폐악이다. 시장이 어쩌고 비정규직이 어쩌고 할 것 없이 원래 세상이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패배주의를 속속들이 전파해, 끝내 그것을 국민 이성에 체화시키고야 말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이 환경미화원들을 모아놓고 "못 살고 힘들어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따뜻한 배려를 해 모두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선진일류국가"라고 했단다. 그저 입 편한 소리고 환상이다.
"못 살고 힘들어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따뜻한 배려를 해 모두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선진일류국가"가 아니라 못 살고 가난한 사람이 값싼 배려와 연민 어린 동냥 없이도 떳떳하게 잘 살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갖춘 나라가 선진국가다.
이랜드, 민중 편에서 투쟁하다 죽은 예수를 생각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