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에 최 광光자 익翊자 어르신이 아들한테 지어준 집이라고 하던 대요. 그러면 우리 어르신한테는 몇 대조가 되시는 건가요?"
"나한테는 10대조 할아버지시지."
"본디 이 집 이름이 '해평최상학씨가옥'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최상학씨는 누구인가요?"
"우리 아버님이시고. 작년에 이 집 이름이 바뀌었어. '구미쌍암고가'로."
이 쌍암고가는 지난날에 이 집 앞에 큰 바위가 두 개가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옛날부터도 '쌍암고택'이라고 일컬었다고 합니다.
"옛날에 10대조 할아버지 후손들이 살던 집이 이 인근에 아홉 집이나 있었지. 우리처럼 이런 집들이 많이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일제 때, '기미'를 하는 바람에 요 앞집(북애고택)하고 우리 집만 남은 거야."
"네? 기미라고요?"
"그렇지. '기미'라고 옛날에 나락을 가지고 하는 주식 같은 거였어. 그때 나락 시세로 지금 주식처럼 사고팔고 하는 거였어. 일제 때 한 십오 년 동안 이 '기미'를 많이 했는데, 주로 상주, 성주, 선산, 칠곡 이런 데서 많이 했지. 그 바람에 다른 집들은 거의 몰락했고 이제 두 집밖에 안 남은 거여."
난 생전 처음 듣는 얘기였어요. 나중에 이 '기미'를 자세히 알아봤더니, 일제강점기 때에 '기미시장'이 있었는데, 오늘날 증권처럼 나락 시세에 맞춰 현물은 없이 약속으로만 사고파는 거였어요. 그 옛날 권세를 누리던 양반가에서도 그것 때문에 집안이 기울어졌다니 놀랄만한 일이었어요.
한번은 7~8년 앞서 이 댁에 강도가 든 적이 있었대요. 그때도 두 어르신 밖에 없었는데, 손을 뒤로 묶어놓고 칼로 위협하면서 '고택'에 있을 만한 옛 문서, 교지, 교첩, 골동품 따위를 3억원 남짓이나 될 만큼 훔쳐갔대요. 모두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것들이라고 해요.
이때 3개 중앙 방송국과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를 했다고 하는데, 다행히 한 달 뒤에 강도도 잡고 잃어버린 물건들도 모두 되찾았다고 해요. 그때만 해도 집안에서 늘 쓰던 물건이라서 그 것들이 그만큼 값어치 있는 것인 줄 몰랐다고 하네요.
그 뒤로는 안동에 있는 '국학진흥원'에 따로 보관해두고 사진을 찍어 문집으로 만들어서 가지고 있다고 하시면서 우리한테도 보여주셨어요. 또, 얼마 앞서 바로 앞집 '북애고택'에도 도둑이 들어서 옛 문서들을 모조리 훔쳐갔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조상이 물려준 것들을 대대로 지키면서 사는 것도 매우 힘든 일인데, 이렇게 험한 일까지 겪으셨다니 참 놀라웠어요.
나도 가끔은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
최열 어르신은 '전주 최씨 인재공파'의 맏집 어르신이었어요. 위로 형님이 계셨는데, 군대에서 전사하시고 둘째였던 어르신이 맏집의 어르신이 된 거예요. 이 댁에서는 위로 4대까지 제사를 모시는데, 4대에 걸친 할아버지, 할머니 8분의 기일과 설날, 추석, 한식, 묘사, 이렇게 한 해에 적어도 열댓 번씩 제사를 모신다고 해요.
어르신도 어르신이지만, 맏집의 맏며느리로 한평생을 지내오신 사모님이 조상들이 물려준 이 집을 지키면서 살아온 날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을까? 싶었어요.
"그 많은 제사를 사모님이 손수 준비하고 모셨겠네요?"
"그럼. 때때마다 집안 손님들이 모두 모이면 시끌벅적하지. 이 댁이 8형제인데 자손들까지 모두 합하면 40~50명쯤 되니까, 제사도 모시고 손님 대접도 해야 하고 할 일이 많지."
"그동안 힘들지 않으셨어요? 제사도 그렇고 이렇게 옛집을 지키면서 한평생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힘들어도 어떡해. 내가 할 일인데, 하긴 나도 가끔은 이런 집 말고 아파트에서 살아봤으면! 할 때도 있었지. 옛날에는 세간 욕심도 많았는데 지금은 아니야. 이제 늙으니까 하나하나 정리를 해야 한단 생각이 들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 대요. 만약에 나중에 두 분이 가시고 나면, 이 집은 어떻게 되나요?"
"우리 큰아들이 살아야지."
"아, 그래요?"
"그럼, 다행히도 우리 아들이 올해에 마흔일곱인데 아들도, 또 며느리도 여기 들어와서 살겠다고 하네."
"참 고마운 일이네요. 젊은 분들이 편한 것 마다하고 여기 와서 살겠다고 하니까요."
▲맷돌안채 마당에는 오래된 맷돌이 여럿 있었어요. 모두 조상들의 손때가 묻어있는 것들이지요.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대대로 이 집을 지켜오면서 손때가 묻어있고 따듯함이 배어있는 물건들이에요.손현희
▲ 맷돌 안채 마당에는 오래된 맷돌이 여럿 있었어요. 모두 조상들의 손때가 묻어있는 것들이지요.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대대로 이 집을 지켜오면서 손때가 묻어있고 따듯함이 배어있는 물건들이에요.
ⓒ 손현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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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이 워낙 나이가 많은데다가 대를 이어 옛집을 지키면서 살아왔는데, 이렇게 손때 묻혀가며 사람 사는 따듯함이 배어나는 이 집이 두 분 어르신 대에서 끊기면 어쩌나 하고 생각했던 건 내 쓸데없는 군걱정일 뿐이었어요. 본디 집은 사람이 살면서 온기를 내뿜어야 한다고 하잖아요.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은 금방 허물어지니까요.
편하고 좋은 것만 좇아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요즘, 옛것을 지키고 가꾸려는 이들이 드문 게 사실이에요. 그러나 조상이 물려준 이 집에서 한평생 살면서도 힘든 줄도 모르고, 마땅한 본분이려니 하고 여기며 살아가는 두 어르신이 무척 우러러보였답니다. 또 이 다음에 이 댁 큰 아드님도 부모님 뜻을 받들어 여기 와서 살겠다고 하니 얼마나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인지 몰라요.
그러면 안 되잖아!
쌍암고가에서 머물면서 이 멋진 집을 더욱 잘 보존하려면 많은 이들이 즐겨 찾아오고, 우리 전통양식이나 예절을 몸소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지난 2002년 월드컵 때에 시에서 한 가지 제안을 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 댁 사랑채에 외국인 손님을 유치하면 어떻겠냐고 했대요.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나이 드신 두 어르신들이 손수 대접하고 수발을 들기엔 너무 힘든 일이라 못하셨대요.
중문간채 곁에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바비큐 통'이 있었는데, 가끔 손님이 오시면 마당에서 고기도 구워 먹으면서 하룻밤 묵어가도록 하기도 한답니다. 어쨌거나 이 아름다운 옛집이 많은 이들한테 사랑받고 즐겨 찾는 곳이 되면 좋겠어요.
끝으로 이 댁 안주인께서 여기를 찾아오는 손님한테 꼭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대요. 이 말은 우리도 참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요.
"구경을 가서 그 집에 사람이 있으면 그게 누가 됐건 인사를 해야지…. 우리 두 늙은이가 여기 살고 있지만 언제라도 찾아오면 먼저 인사를 잘하면 좋겠어. 어떤 때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가 함께 와서는 사람을 보고도 인사 한 마디 없을 때가 있거든. 그러면 나도 내다보기도 뭣하고 서로 뻘쭘할 때가 있다니까? 그러면 안 되잖아!"
사람들이 구경을 왔을 때, 사람이 없다면 모를까 집안에 누군가 있으면 그게 집임자이든 아니든 아는 체를 해야 옳다는 얘기였어요. 생각하니 참 옳은 말이에요. 길에서도 사람을 만나면 인사하는 게 마땅한 일인데도 하물며 남의 집에 들어오면서 그러면 안 되지요.
두 어르신과 헤어져 나오는데, 지팡이를 짚고 대문간까지 나와서 배웅해주던 바깥 어르신 얼굴이 자꾸만 떠오르네요. 나중에 또 놀러 오라고 하면서 그만 들어가시라고 해도 끝까지 서 계셨어요. 우리 모습이 뵈지 않을 때까지…….
2008.04.09 17:59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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