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등치기 국수.메밀로 만든 국수로 찬물에 말았다. 국수발이 콧등을 친다 하여 콧등치기다.
강기희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의 단편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한 대목이다. 이효석이 살던 봉평 지역에도 메밀이 많았지만 정선 지역도 메밀 농사를 많이 지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오래 전 <TV 문학관>(KBS1)에서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촬영할 때 배경이 된 메밀꽃밭은 거의 정선 지역이었을 정도였다.
신령스런 곡식으로 만든 메밀국수 "콧등을 철썩 때려요~"산촌 마을에 살던 어린 시절엔 메밀밭이 화전으로 일군 산허리밭까지 가득했다. 소금을 뿌린 듯 하얗게 핀 꽃만 봐도 배고픔을 잊을 정도였다. 메밀 잎을 따서는 나물로 무쳐 먹기도 했고, 줄기는 불쏘시개로 사용했다. 메밀 껍질은 '달갱이'라고 했으며, 베개 속으로 활용했다. 그 베개가 지금은 건강 베개로 인기를 끈다니 가난이 오히려 건강을 지켜주었던 셈이었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메밀은 척박한 땅에서 잘 자랐다. 그런 이유로 비옥한 땅엔 고추나 감자, 옥수수 등을 심었고 메밀은 돌밭에 뿌렸다. 메밀 농사는 다른 농사법과는 달랐다. 골을 켜고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밭에다 훌훌 뿌렸다. 이 지역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메밀을 푼다'고 표현했다.
메밀은 다섯가지 색을 가진 곡식이다. 꽃은 흰색이요, 잎은 푸른색이다. 열매는 검은색이고, 메밀 줄기는 붉은색이다. 황색인 뿌리로 다섯가지 색을 마저 채운다. 때문에 메밀은 다섯가지 방위를 나타내는 신령스런 곡식으로 알려져 있다. <동의보감>에는 '메밀은 그 성질이 차며 맛은 달고 독이 없다.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고 기력을 북돋운다'라고 적고 있다.
신령스런 곡식인 메밀은 감자, 옥수수와 함께 정선 지역의 대표적인 먹을거리를 만들어냈다. 메밀로 만들 수 있는 음식도 많다. 메밀국수를 비롯해 메밀묵, 메밀전, 메밀전병, 메밀밥, 메밀수제비, 메밀국죽 등등.
어린 시절에만 해도 아침엔 메밀국죽, 점심엔 메밀국수, 저녁엔 메밀 수제비를 먹었다. 하루 종일 메밀로 만드는 음식을 먹었지만 물리거나 질리지 않았다. 다들 그 맛과 모양이 독특하고 다양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