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산>에 소개된 정조의 여인들. 이들은 결과적으로 왕실의 대통을 잇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다.
MBC
요즘 안 그래도 바쁜 정조 임금이 후사를 얻는 문제로 인해 성심(聖心)을 다치고 말았다. 발칙한 원빈 홍씨의 거짓말(가짜 임신)이 오빠 홍국영의 또 다른 거짓말로 이어지면서 왕실은 일대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말았다.
원빈에게 첫날 밤 소박이라는 치욕을 안겨준 정조. 평소 원빈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던 정조도 원빈의 복중 용종(龍種, 왕족의 의미)이 행여 잘못되지는 않을까 하고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도 정조 임금은 24년이라는 재위기간에 비해 자녀가 매우 귀한 편이었다. 효의황후와 원빈 홍씨에게서 자녀를 얻지 못한 정조는 정조 4년(1780)에 화빈 윤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였지만, 실록에서는 화빈이 임신을 했기 때문에 산실청을 설치했다고만 기록했을 뿐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주지 않고 있다. 뭔가 잘못된 모양이다.
성송연의 실제 모델인 의빈 성씨의 경우에는 문효세자와 옹주 하나를 낳았지만, 아들은 다섯 살 때에 홍역으로 사망하고 딸은 생후 1년도 안 되어 죽고 말았다. 원빈·의빈 외에도 여러 명의 후궁들을 맞아들였지만, 그들에게서도 별다른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정조 14년인 1790년에 순조가 태어나기 전까지 정조는 계속해서 심각한 '자식 가뭄'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서 잠시 여담을 소개하면, 정조의 차남인 순조 이공(李玜)의 호가 좀 재미있다. 본래는 재미있는 호가 아니었지만, <이산>의 방영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 순조의 호는 순재(純齋)였다. 이 순재. 이름이 아니라서 이순재라고 붙여 쓸 수는 없지만, 아무튼 순조 임금은 '이 순재'였다.
다시 심각한 이야기로 돌아가서, 여러 명의 후궁을 두고도 2남 2녀밖에 못 낳았을 정도로, 게다가 그중 1남 1녀는 일찍 사망했을 정도로 정조는 자식이 매우 귀한 임금이었다.
사실, 정조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많은 왕들이 자식 가뭄, 즉 후사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처럼 선거를 통해 후계자를 결정하지 않고 왕이 후계자를 직접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되던 전통시대의 산물이었다.
건국 초기의 활력, 공신들과의 다중적 정략결혼 등이 원인이 되어 통치자 한 명이 수십 명의 자식을 낳기도 했던 조선 초기와는 달리, 후대로 가면 갈수록 조선왕실에서는 자손을 보기가 점차 힘들어졌다. 이 점은 오늘날의 일본 왕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왜 왕들은 자녀를 많이 낳지 못한 걸까? 조선 팔도에서 올라온 온갖 진귀한 음식을 매일 먹으면서, 또 후궁 외에도 수많은 궁녀들을 옆에 끼고 살면서 왜 자식들을 '팡팡' 낳지 못한 걸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의문을 갖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 듯하다. 궁궐이라는 환경 자체가 왕의 자녀가 무사히 태어나기에는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는 점, 왕들이 바쁜 공무로 인해 육체적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는 점, 왕들이 일상생활 중에도 항상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점 등을 대표적으로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