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만 상임대표가 일본 후쿠오카 출입국심사대에서 받은 '안내문'을 들어보이고 있다.
윤성효
"아뿔싸! 승선하기 전에만 알았어도 아예 출발 안 했을 텐데"유기농산물 유통업을 하는 (주)녹색세상에서 유기농 가게 '신시'를 운영하는 전국의 점주들을 위해 무료로 실시하는 해외연수 프로그램에 아내가 생산자의 자격으로 여행비 일부를 지원받아 가게 된 것이다.
3월 27일 오후 5시,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에 모인 일행이 140여 명이나 되었다. 저녁 7시가 거의 다 된 시간에 여객선에 승선을 마치고 서둘러 저녁을 먹은 후 일행이 한 방에 모인 가운데 여행사 직원이 사전 안내를 하면서 입국심사 때 지문 채취와 얼굴 사진 촬영을 한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난해 11월 20일부터 시행하고 있었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너무나 당황스러워 등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아뿔싸! 부산에서 승선하기 전에만 알았어도 아예 출발을 하지 않았을 텐데…."
그 순간부터 다른 이야기는 아예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누가 우스갯소리를 했는지 아내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아직 나의 고민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앉은 자리에서 빙 돌아가며 자기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짤막하게 자기 소개를 했다. 다음 내 차례, 무거워진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나는 이 사람을 따라온 사람입니다"고 말하자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전혀 웃기려고 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냥 그렇게 말을 끊고 앉는 것이 딱 맞는 상황인데 이어서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나는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입니다. 지문날인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집 사람이 올해 환갑이라 기념여행을 왔는데…."
어쩌고저쩌고 하며 몇 마디 하다 보니 방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워지는 것 같아 '어 이거 내가 실수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다. 그냥 남들이 하는 대로 슬며시 따라 나가면 내 비밀을 눈치 챌 사람도 없는데….
재빨리 아내의 표정을 살펴보니 별로 심각하지 않은 것 같아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자기 소개 마지막 차례쯤 되어서 어느 분이 우리 부부를 가리키며 "특히 두 분에게 좋은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덕담에 콧잔등이 찡해졌다. 자유 시간이 주어졌지만 약간의 감기몸살기까지 겹친 나는 꼼짝도 하기 싫었다.
아내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잘 자라"며 여성 전용으로 정해진 방으로 갔다. 밤새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새벽에 눈을 뜨고 일어나 세면장과 복도를 오고가며 만난 일행들이 나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표정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당신 소신대로 하세요"하선을 위해 줄을 선 채 아내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 내가 여기에서 지문 날인을 하고 가면 앞으로 살아 있는 동안 그 일로 너무 괴로울 것 같아. 그러나 이런 일로 내가 당신과 함께 일정대로 여행을 못한다면 평생 마음이 아플 것 같아 어찌해야 할지…"하며 어렵게 말을 꺼냈더니 이미 내 속을 훤히 드려다 보고 있은 듯이 즉각 대답이 돌아왔다.
"당신 소신대로 하세요."
아내의 대답에 용기를 얻은 나는 급히 팀장들과 여행사 직원을 찾아 내 생각을 전했다. 안타까운 표정들이었지만 아무도 말리지는 않았다.
"정말 어려운 결정 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입국 하면서 당해야 하는 굴욕감, 불쾌감을 대변해 주시는 것 같아 고맙습니다"라며 내미는 명함을 보니 '(주)녹색세상 김석환 부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혹시 나로 인해 다른 분들이 맘을 상하거나 불이익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하니 그는 "저희들이 선생님의 뜻을 충분히 전해 드리겠습니다"라며 나를 격려해 주었다.
일행이 모두 출입국 절차를 마치고 빠져나간 뒤 심사국 직원들이 찾아와 몇 가지를 요구 했다. 강제퇴거 명령을 내리겠다며 한국어로 된 관련 법문을 내밀었다. 이제는 입국이 아니라 강제출국을 위해 지문채취와 사진촬영을 해야 하는 것이 자기들의 법이란다.
처음에는 전화 통역으로 했지만 말이 길어지자 나중에는 부산 동아대를 졸업했다는 여직원이 통역으로 나섰다.
"당신들의 강제퇴거 명령에 절대 응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들의 법으로 나를 어떻게 해도 나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런 짓을 하는 나라에는 두 번 다시 오고 싶지도 않다. 내 발로 내가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