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의 글씨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여손, 대충 그 뜻은 두부와 오이, 생강보다 나은 반찬이 없고, 부부와 자손들이 모이는 모임보다 좋은 자리는 없다는 뜻이다.
추사 김정희
“이 아이가 글씨를 배우면 천하의 명필이 되겠지만… 인생이 기구할 테니… 당장 그만두게 하시오.”여섯 살 난 아이가 쓴 글씨를 보고 그 앞날을 예언한 번암. 바로 이 아이가 김정희였고, 과연 번암의 예언대로 역대 최고의 명필, 최고의 석학이 되었지만 예술적, 학문적 성취에 비해 일생 동안 삶이 기구했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었다.
오늘 주제는 사실 번암의 관악산 산행기인데 잡설이 너무 길었다. 이제 번암을 따라 관악산으로 가보자. 당시 67세의 나이로 노량진 근처에서 은거해 살고 있었던 번암이 하루는 동생과 아들을 비롯한 집안 식구들과 함께 관악산 연주대에 오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처음엔 물정 모르고 말을 타고 갔지만 길이 험준해 곧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고, 넝쿨 붙잡고 골짜기를 헤매다가 암자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는, 말 그대로 조난을 당하기도 했다. 다행히 일행 중 한 명이 길을 찾아 모두들 환호하며 암자에서 하루를 묵는다.
요즘은 당일 코스지만 그 시절엔 사흘 길이었다. 오며 가며 하루씩을 절에서 묵어야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노량진에서 말 타고 10리를 갔다고 하니 관악산 북면, 지금의 서울대 입구 방향으로 들어간 것 같은데, 하루를 묵었다는 불성암은 오늘날 산의 남쪽면 과천 쪽에 있으니 그들이 어느 길로 들어가서 어떻게 해메 다녔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튿날 아침 연주대 가는 길은 워낙 험해서 나무꾼들이나 중들에게도 힘겨운데 대감께서 오를 수 있을지 걱정이라는 스님들에게 번암은 명대사 한 마디를 날린다.
“천하만사는 마음에 달렸을 뿐이네. 마음은 장수요, 기운은 졸개이니, 장수가 가는데 졸개가 어찌 가지 않겠는가?”그 후 번암이 연주대에 오르는 길을 묘사한 부분은 참으로 재미있다. 천길 낭떠러지 절벽에 바짝 붙어서 눈을 옆으로 돌리지도 못하고 늙은 나무뿌리를 겨우 붙잡고, 그야말로 노인네가 생전 안 다녀본 산길을 설설 기면서 오른 것이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고쟁이가 뾰족한 부분에 걸려 찢어져도 안타까워할 틈이 없다’고 했겠는가.
마침내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간 연주대에서 이 노인네는 도성을 내려다보며 오래 전 미수 허목(1595~1682)이 연주대에 오른 일을 상고하며 탄식을 한다.
“미수 어른은 83세에 연주대에 오르면서도 걸음이 날 듯했다는데, 나는 기력이 쇠진하고 숨이 차서….”또한 자신도 훗날 여든 셋이 되면 남의 등에 업혀서라도 이 연주대에 다시 오리라 다짐도 한다. 노인네가 욕심도 많지, 당대에 67세면 이미 드물게 장수한 편이거늘 여든 셋까지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물론 안타깝게도 번암은 꼭 팔십을 채우고는 돌아가시는 바람에 여든 셋에 다시 연주대에 오르겠다는 그의 희망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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