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화실과 좌선실.
안병기
고심원을 중심에 두고 봤을 때, 왼쪽에 있는 'ㄱ' 자형 건물이 염화실과 좌선실이다. 동향하고 있는 염화실은 거동이 불편하신 성철 스님을 모시려고 지은 건물이다. 연만하신 스님이 문턱을 넘어서기조차 힘들어 하시자 공사 끝에 문턱까지 없앴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 성철 스님께선 단 한 차례 이곳에 들어와 앉아 보시고 입적하셨다고 한다.
성철 스님(1912~1993)은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진주중학교를 졸업한 후 해인사로 출가하여 하동산 스님 밑에서 득도하였다. 이후 10년간 금강산의 마하연선원 등 여러 선방을 두루 거치면서 안거하셨다. 음식은 주로 생식과 현미밥과 담식을 드시면서 용맹정진을 거듭하셨다. 파계사에서 행한 장좌불와 8년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렇게 선종의 정통법맥을 이으신 스님이지만, <선림고경총서> 시리즈 등 많은 저술을 남기셨다. 특히 81년에 내신 <선문정로>라는 책에선 보조 지눌 이래 8백년 간 점수사상에 물들어 있는 선문의 병폐를 지적했다. 7c 중국의 화엄학자였던 청량징관(淸凉澄觀)이 자신의 스승 혜원을 이단으로 몰면서 했다는 "몹쓸 나무가 뜰 안에 돋아났으니 베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라는 말을 인용할 정도로 통렬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성철 스님께선 보조 지눌이 내세웠던 돈오점수(頓悟漸修) 대신 돈오돈수 (頓悟頓修) 사상을 전면에 내세우셨다. 돈오돈수란 '단박에 깨달으면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는 것이며 돈오점수란 '깨달은 뒤에도 점차 닦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같이 불교 사상에 끈이 짧은 사람이 무얼 알까마는, 그래도 돈오점수는 나태함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생각쯤은 해 볼 수 있다. 벽력같이 깨치는 것이 아니라 슬슬 닦다가 언젠가 깨달으면 될 것 아닌가. 돈오점수에는 절실함이나 투철함이 묻어있지 않다.
전두환 정권 시절, 하도 권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종정을 맡아 조계종을 이끌던 스님은 마침내 1993년 육신의 껍질을 벗어버리시고 적멸에 드셨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상좌들에게 "참선 잘해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라는 스님의 열반송의 첫 구절을 생각한다.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스님 같은 위대한 영혼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마는 나는 그 구절을 이렇게 의역한다. 내 말에 속지 마라. 그건 어디까지나 내 이미지에 불과하니까. 너 자신을 속이지 마라. 정직하지 않으면 너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없으니까.
스님이 무리를 속이신 것일까. 스님은 "내 말에 속지 마라"라고 누누이 말씀하셨지만, 속은 것은 어리석은 대중일 뿐이다. 스님께선 그마저도 미안했던지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라고 덧붙이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