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세폴리스아파다나, 다리우스 왕이 그의 신하와 백성을 알현 했다는 곳. 지금은 석주들만 하늘로 뻗어 있다. 지금은 원래의 기둥들 중 일부만 남아 있지만 고대에는 높이 18미터에 달하는 36개의 기둥이 거대한 천정을 받치고 있었고, 이 홀 안에는 무려 1만 명의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김성국
공사에 동원된 모든 일꾼에게 급료를 지급했다니…이 폐허가 된 고대의 도시는 수천 년의 세월을 모래와 흙먼지에 뒤덮인 채 묻혀 있었고, 1930년대 이곳의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서서히 과거의 잃어버린 영광이 세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 위대한 왕조의 심장부에 서 있는 도시 페르세폴리스는 발굴되기 전까지만 해도 서구 사회의 역사기록에서는 거의 언급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고고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페르세폴리스의 존재 자체를 바깥세상에는 언급하지 않고 비밀로 했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페르시아인들은 역사에 거의 문서를 남기지 않았기에, 페르시아에 대해 아는 건 대부분 그리스의 자료를 통해서다.
그런데 그리스와 페르시아는 원수지간이었고, 전쟁에 이긴 건 그리스였다. 결과적으로 역사는 승자인 그리스 인들에 의해서 쓰인 것이다. 그리스 인들은 스스로를 높여서 미화했고, 페르시아인들은 잔인하고 낙후된 민족으로 폄하하여 묘사했다.
하지만 최근 활발해진 페르세폴리스 연구를 통해, 그것들이 근거 없는 비난이었음이 밝혀졌다. 페르시아는, 그 어느 고대제국보다도 평화를 사랑했고, 타민족의 생활방식과 그들의 문화를 인정하고 유지할 수 있게 허용하는 관용적인 제국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 페르세폴리스와 관련된 이야기 중 정말 믿기 어려운 부분은, 그 옛날, 이 공사에 동원된 모든 일꾼들에게 급료를 지급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이 공사에 쏟아 부었다. (이 유적에서 발굴된 설형 문자를 해독해 알아낸 사실이라고 한다.)
찻집을 찾아 박물관 근처를 서성일 무렵, 영아를 잃어 버렸다. 한참을 찾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영아가 갈 데가 있다며 손을 잡아끌었다. 잠시 후 찻집은 없어졌지만, 방문객에게 차를 한 잔 대접할 수는 있다며 이란 식 홍차를 내놓은 이란인 현지 아가씨를 소개받았다.
그녀의 이름은 미나. 작년부터 이곳에서 발굴 작업 일을 한다는 이 아가씨는, 종이와 연필을 꺼내더니, 우리에게 시라즈(Shiraz)에서 가볼 만한 곳들을 죄다 적어주었다. (후일 그녀와의 인연은 과거 세계의 중심이라 불렸던 도시, 이스파한에서 다시 이어지게 된다.)
보통은 사람들이 한두 시간 만에 구경하는 이곳을 다섯 시간이 넘도록 보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았다. 비록 알렉산더의 말발굽 아래 폐허가 되었고, 지금은 부서진 도시로 남아 있지만 그 옛날 2000년도 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 당시 사람들이 만들어낸 위대한 문명의 흔적과 그들이 누린 영화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펴보게끔 하는 데는 조금의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기원 전에 지어진 건축물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와 웅장함이 있었고, 이번엔 어린 시절 읽었던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영웅이었던 알렉산더 대왕의 편이 아닌, 페르시아의 편에 서서, 침략자, 파괴자 알렉산더를 지켜보는, 또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내 생애 다시 이곳에 들러 페르시아의 영화를 추억할 일이 있게 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