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엠립에서 처음 만난 풍경. 사람도 의자도 나무도 친절한 곳
이승열
내려놓고, 비우기로 작정하고 떠난 길, 한 발자국 떨어져 날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보려고 다시 찾은 여행지에서, 눈뜨자마자 처음 든 생각이 수영이라니. 반드시 무엇인가를 꼭 해야한다는 습관적인 강박관념의 드러남이다.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 내가 내게 속삭인다. 나를 향한 연민이 잠깐 스친다.
씨엠립에서의 아침은 당연히 쌀국수, 앙코르의 유적들도 그리웠지만 가장 많이 그리웠던 것이 바로 아침마다 먹던 쌀국수였다. 뜨거운 육수에 살짝 꺼냈다 건져, 그대로 숨이 살아있는 푸성귀와 어우러지는 가는 국숫발은 매력적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식탁에 내려앉은 그림자의 농담, 나뭇잎 색깔, 공기 냄새까지 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느긋하게 대하는 아침 밥상이 얼마 만인가? 초침까지 재가며 허겁지겁 밥알을 우겨 넣던 서울에서의 아침 식사, 밥상이라 이름 붙이는 것조차 미안했던 식탁 모습이 떠오른다.
호텔 로비로 나오니 씨엠립에 머무는 동안 우리들과 함께 할 삼 소반(Sam Sovann)이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다. 마르고 골격이 작은 대부분의 캄보디아 사람들에 비해, 여유 있는 몸매에 눈부터 웃음을 짓는 선한 얼굴이다. 영어가 서툰 소반, 소반보다 영어가 더 서툰 우리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은들 무에 그리 대수랴. 말이란 것이 본디 입에서 튀어나온 순간 본질과 더욱 멀어지고, 설명하려 애쓸수록 더 진창으로 빠지며 헝클어지는 것을 그 동안 숱하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유적지 관람 입장권을 끊으려 준비해 온 사진을 내미니 도로 돌려준다. 매표소 앞에 설치된 화상 카메라에 찍힌 내 얼굴이 입장권에 바로 인쇄 되어 나온다. 일껏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찾아 준비해 왔건만, 예상치 못한 새로운 기술 장비 탓에 입장권의 나는 강한 햇빛으로 좀 찡그린 얼굴을 달고 다니게 생겼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화상 카메라가 등장한 것만큼 앙코르와트가 지난번과는 많이 달라져 있어도 절대 실망하지 말자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매일 매일이 새로운 세상에, 이젠 적응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속도 속에서 살면서 앙코르와트만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있길 바라는 것은 얼마나 가당치도 않은 이기심인가.
세상에 이런 속도가 존재했었나 싶을 만큼 소반은 편안하고 느리게 차를 몬다. 앞에 뚝뚝이 가고 있으면, ‘너 비켜. 왜 앞에서 얼쩡거려. 빵!빵!빵! 안 비켜, 휘익’ 하는 금속성의 신경질적인 경적을 먼저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 가고 있으니 앞의 뚝뚝 기사 양반 조심 혀. 빠-아-앙-’ 하며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속도방지턱이라도 등장하면, ‘쿵, 덜커덩’ 하고 넘는 것이 아니라 요동도 없이 ‘사알짝’ 넘는다.
이내 앙코르와트 앞 해자가 나타나고, 그 해자 뒤로 아스라이 앙코르와트 천상계 메루산에 솟은 연꽃 다섯 송이가 보인다. 앙코르와트와의 재회를 뒤로 미루고, 먼저 앙코르 톰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