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가 본 나라 중에 어디가 제일 아름다웠어?", "멕시코지?"라고 호들갑 떨며 물어오는 아리따운 자매에게 다른 답을 했다간 낭패감에 휩싸일 것 같아 열차를 타고 갔던 크레엘(Creel)이 예뻤다고 말해줬다.
동글동글한 눈을 내 시선에 맞추며 물어보는 루피타의 모습이 꽤 귀여워 슬쩍 장난끼가 발동했다.
의아해진 그녀가 되물었다.
이쯤에서 잔뜩 상기된 나는 10년도 훨씬 지난 옛 추억을 회상하며 그 당시 처절했던 축구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경기를 온 몸을 다한 연기로 재연해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혹시 예전 미국 월드컵 기억 나? 우리 나라가 첫 골을 넣고도 1:3으로 졌잖아! 그 블랑코의 볼점핑 플레이. 자, 보라구! 이렇게 볼을 발 사이에 낀 채로 수비수들을 제치고 플레이하던 그 친구 말이야. 아휴, 방송 해설자들도 당황할 만큼 지금 생각해 봐도 아주 소름이 쫙 끼치는 플레이였거든."
침 튀겨가며 당시 상황에 대한 재구성과 함께 익살스런 열연을 펼치자 이를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까지 포복절도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조국 축구에 대한 자부심을 박수로 드러낸다.
이제 그네들의 연습시간도 끝났겠다 함께 기념으로 사진 촬영도 마쳤겠다 슬슬 숙소를 정해야 했다. 그러자 엘리자벳과 루피타가 자전거를 타고 같이 따라가 주겠단다. 자기들이 도와주겠다는 거다. 남자들은 그저 멀뚱멀뚱(나에겐 참으로 고마운 액션이다). 그 중에 유난히 심퉁맞은 표정으로 서 있는 남자애도 있었다. 아무튼 가지런한 치아, 오목 들어간 보조개, 그리고 그윽한 눈빛과 명랑한 성격. 거기에 마음까지 예쁜 두 자매. 둘에게 50대 50으로 시선교환을 한 다음 오케이 사인을 냈다.
하지만 숙소를 구하러 30여분 정도 돌아다녔지만 내 입맛에 꼭 맞는 마땅한 숙소를 구하지 못했다. 숙소를 구하지 못했음에도 얼굴엔 연신 웃음꽃이 활짝. 선남(?)선녀의 이야기에 주제보다는 분위기가 중요한 법이니까. 함께 길을 가다 넌지시 그녀들에게 말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다니. 너희들은 분명 천사들이야."
난 이런 말에는 거짓을 담을 줄 모른다. 그러자 동생 루피타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되받아쳤다.
"얼굴도 아름답지 않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와 엘리자벳의 무언의 공감대는 어렵지 않게 마련될 수 있었다.
얼마 후 언니 엘리자벳에게로 우연찮게 연락이 닿았다. 다름 아닌 댄스 학원 원장의 남편이 날 도와주겠다는 거였다. 더욱 재미있는 건 알고 보니 처음 내가 사진 찍었던 아이의 엄마가 바로 학원 원장이란다. 그래서 내가 들른 후에 다시 숙소를 구하러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남편이 기꺼이 숙소 잡는 것을 돕겠다고 했다. Yes! 우연에서 인연으로! 흐뭇한 마음에 그를 만나러 다시 학원으로 한 걸음에 달려갔다.
아이의 손을 잡고 자상한 아버지상으로 서 있던 그는 나와 인사를 하고는 괜찮다면 자신의 집에서 자도 좋고 아님 모텔에서 자도 괜찮다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나의 선택은 모텔이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나도 모르게 미리 예약 지불해 놓은 따뜻한 배려였다. 그리고 난 두 자매에게 찬찬히 읊조리듯 농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진정한 천사는 엘리자벳과 루피타 너희들이 아닌 아케미로군."
학원에서는 모두들 나를 아니 두 자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모두와 헤어질 시간. 짧은 만남이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다들 악수를 건네며 언제가 먼 훗날을 기약해야 했다. 남자애들과 악수를 마치고 이제 루피타와 안녕을 고해야 했다. 방긋 웃던 루피타는 예의 쾌활한 성격 그대로 악수 대신 포옹과 볼인사로 깊은 여운을 남겼다. 아마도 특별한 인사로 자신을 남들과는 다르게 기억해달라는 의미겠지 싶다. 엘리자벳 또한 같은 방식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 옆에는 조금 심란한 표정의 남자가 경직된 표정으로 나와 엘리자벳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니?"
"응, 내 남자친구."
'아이쿠, 하필 쟤가 남자친구라니!'
그 말에 코뿔소와 나무늘보의 불건전한 만남의 산물임이 분명해 보이는 녀석의 표정이 득의양양해진 듯 보였다. 내가 등장한 이후로 엘리자벳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고까웠던지 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그였다. 어쩐지 사진 찍을 때도 나와 엘리자벳의 사이를 유난히 신경 쓰는가 싶더니만. 그런 그가 아리따운 엘리자벳의 남자친구라는 건 심각한 충격을 초래하는 완벽한 반전이었다. 역시 사람을 단지 눈에 보이는 외모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는 법. 하긴 그 녀석도 날 보면서 동방에서 웬 E.T같이 생긴 녀석이 여기까지 와서 깐죽대냐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춤추는 친구들과 헤어진 후 모텔에서 샤워를 하고 슬리퍼를 끌어 신고는 밖으로 나왔다.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핑계로 저녁 식사를 고르고 고르기 위해서였다. 살짝 쌀쌀해진 바람이 가슴에 파고 들어와 구부정해진 허리에 양 손은 바지 주머니 깊숙이 박아둔 채 열심히 두리번거리며 발품을 팔고 있을 때였다. 어둠 속 어디선가 많이 익숙한 멜로디가 고요하게 합창되고 있었다. 바로 옆 오래된 건물 안에서 '오, 나의 자비로운 주여!'가 잔잔히 흘러나왔다.
그 멜로디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세웠다. 그리고 그 자리에 꼿꼿이 선 채로 얼마 간 예배당 내부의 그들을 바라보았다. 한 곡 한 곡 정성을 다해 소리를 모으는 그 화음에는 내면에 꼭꼭 감춰둔 고독한 본질을 끌어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솜이불 같은 품으로 그 끌어낸 옹그려진 외로움을 감싸 안아주는 느낌. 슬며시 마음이 흡족해졌다. 연이어지는 캐롤송. 익숙한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니 머리에서 인식되는 피곤함을 몰아내고 한없이 마음이 평안해져 왔다. '그래, 이거야.'
합창이 끝나고 그 평안해진 마음이 내부 요인으로 다치지 않게 근처 닭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크리스마스 이브라지만 마땅한 별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12월 24일 늦은 밤 에스꾸이나빠(escuinapa)에는 나의 하루를 환하게 비춰주는 보름달이 전깃줄에 걸터앉아 있었고 또 나의 하루를 풍성하게 채워주는 닭고기가 화로 위에 걸터앉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내 볼에도 엘리자벳의 진한 향기가 살포시 배어 남아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2008.03.11 10:08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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