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서울대학교 소재.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홈페이지
이 대목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정조가 수구적 조정 중신들뿐만 아니라 외척세력까지도 배척할 목적으로 규장각을 세웠다면,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뭐가 이상하다는 말일까?
정조가 그런 목적으로 규장각을 세웠다면, 정조가 규장각 설립 당시인 정조 즉위년(1776) 9월 25일에 홍국영을 규장각 직제학(규장각 책임자인 제학의 바로 밑)에 앉히고 정조 2년(1778) 3월 25일에는 그를 규장각 제학에 앉힌 게 이상하지 않은가? 홍국영 같은 외척을 제거할 목적으로 규장각을 세웠다면서 정작 외척인 홍국영을 그 수장 자리에 앉혔다는 게 어딘가 모순적이지 않은가?
위에서 규장각 설립에 정조 특유의 퍼스낼리티가 작용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정조는 자기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또 일을 한 번에 이루려 하기보다는 차근차근 진행하는 스타일의 소유자였다. 그는 ‘미래의 목표’를 추구할 때에 반드시 ‘현실의 조건’을 고려하는 사람이었다.
홍국영이 규장각 직제학·제학 등을 지낼 때만 해도, 그에 대한 정조의 정치적 의존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즉위 직후만 해도 정조는 인적 기반이 취약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홍국영에게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홍국영에게 규장각을 맡긴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정조가 규장각을 홍국영에게 맡겼던 것은...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홍국영이 규장각 고위 책임자 자리에 있었을 때에는 정조가 규장각에다 온 열정을 쏟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조가 규장각의 조직·기능을 정비하면서 이 기구를 활성화시킨 시점은 홍국영이 제거된 뒤인 정조 5년(1781)이었다. 이때부터 정조는 규장각을 통한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본격적인 작업을 개시한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팽(烹)이라는 단어를 연상했을지도 모른다. 토사구팽의 그 ‘팽’ 말이다. 정조 역시 사람을 실컷 이용하다가 단물만 쪽 빼먹고 내쳐버리는 그런 류의 ‘인간’이었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기 부인인 효의황후를 죽이려 한 홍국영에 대해 가산만 몰수한 채 낙향시키는 조치를 취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정조는 인간적으로 그렇게 매몰찬 사람이 아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정조의 인간성은 정적을 다루는 태도에서도 잘 드러났다.
홍국영 역시 자신이 싫어하는 외척의 일원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은인인 홍국영만큼은 어떻게든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홍국영에게 규장각을 맡긴 동안에는 홍국영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그가 변화하기를 기다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홍국영이 그런 정조의 마음을 몰라준 게 그의 실각을 초래한 결정적 원인일 것이다.
정조에 대해 너무 호의적인 게 아니냐고 할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정조가 그렇게 매몰찬 ‘인간’이 아니었다는 점 ▲정조가 즉위 직후부터 홍국영을 내칠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볼 만한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에 위와 같이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주군의 숙원인 탕평정치를 외면한 채 자신의 세도정치를 확립시키려 한 홍국영이 제거되고 난 뒤에야 규장각은 비로소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한 힘찬 뱃고동을 울리게 되었다. 이 규장각을 통해 각양각색의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새로운 세상을 한 번 만들어보겠다는 것이 젊은 군주 정조의 원대한 ‘희망사항’이었다.
사색당파는 물론 서얼들까지도 참여하는 새로운 조정을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조선을 만듦으로써 조선의 체제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것이 정조의 열정이었다. 정조 임금이 어느 제왕보다도 열심히, 그것도 밤늦도록 집무실을 지킨 데에는 그 같은 열정이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슬람 군대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코란을 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조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 손에는 장용영을, 한 손에는 규장각을 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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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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