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고 있는데, 나영준 기자가 능숙한 가이드처럼 설명을 한다.
"저기 고물상 건물 보이죠. 저기는 영화 <초록물고기>를 찍은 곳이에요. 저기 굴다리는 영화 <구로아리랑>에 나온 곳이에요. 옥소리와 이경영이 굴다리에서 뭘 했는데, 뭘 했더라? 가리봉동 모습이 제일 잘 나온 영화는 뭐니뭐니해도 <장밋빛 인생>이죠. <장밋빛 인생> 봤죠?"
가리봉동 여행을 위해 남구로역에서 나왔더니 영화 <눈물>에서 봤던 집과 길들이 보인다.
공동화장실과 좁은 방들. 나영준 기자가 '벌집'이라고 설명한다. 2~3평짜리 작은 방들로, 한 건물에 20~30개씩 방이 있다. 1970~80년대 여공들이 주로 살았던 이 좁은 방엔 지금 조선동포들이 주로 산다.
값이 싸 주머니 가벼운 이들의 안식처였던 쪽방은 지금도 여전히 싸다. 100만원 이하 보증금에 10만원대 월세인 방이 눈에 많이 띈다. '보증금 30만원, 월세 12만원'인 광고를 보고 "무척 싸다"고 했더니, 나영준 기자는 "보증금이 아예 없는 곳도 있다"고 말을 보탠다.
한 눈에 봐도 오래된 가게들이 눈에 많이 띈다. 30년 된 식당과 40년 된 목욕탕, 50년 이상 됐다고 알려진 여관과 여인숙. 가리봉시장과 구로시장도 세월의 때가 잔뜩 묻어 있다. 우리은행 구로동 지점도 오래돼 보인다. 나영준 기자가 "어릴 때부터 다녔던 곳들"이라고 말한다. 부동산 간판이 붙은 한 건물을 찍고 있으니, 한 아주머니가 "거긴 화장실이에요"라고 말하며 웃으며 지나간다.
가리봉2동에 있는 높이 10m짜리 측백나무는 이 동네 터줏대감이다. 수령이 약 500년이니 조선시대 초창기부터 이 동네서 살고 있는 셈이다. 원래 두 그루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었으나 8·15 해방을 전후해 한 그루가 사라졌다. 1994년 서울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서울시민이 뽑은 서울명소 600선'에 수록돼 있다.
명소로 지정돼 있지만, 집과 집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한국 수출 비중 10%의 구로공단, 한 때 노동자 11여만명
가리봉동이 쇠락한 동네의 표본처럼 회자되지만 그것은 1990년대 10년간 기억일 뿐 1970~80년대 가리봉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동적인 동네였다. 구로공단은 대한민국 경제성장을 가장 앞에서 이끌었고, 노동운동의 역사도 이곳에서 시작되고 꽃피었다.
가리봉동을 상징한 구로공단의 공식명칭은 한국수출산업공단이다. 1964년 발족한 구로공단은 구로구 구로동과 가리봉동 일대 198만2천㎡에 만들어졌다. 1964년부터 88년까지 눈부신 성장을 기록했다. 1968년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가 이 동네에서 열리면서 한국 경제 전초기지가 될 것임을 널리 알렸다.
전성기였던 1986~88년엔 전체 고용규모가 11만여명이 넘었고, 우리나라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10% 가량 됐다. 1988년 수출액이 56억3600여만달러였으니 지금 돈으로 따지면 5조가 넘는다. 1985년 6월 24일엔 최초의 노동자 연대파업인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났다.
당시 번성했던 시기에 대해서 묻자, 나영준 기자가 바로 눈 앞 풍경인 것처럼 설명한다.
"여기 중국동포 거리 보이죠? 그 당시에 평일 밤이나 주말이 되면 지나가질 못했어요. 사람이 너무 많았거든요. 거의 명동 수준이었죠. 당시 극장이 네 개가 있었는데, 명절 때 영화라도 볼라치면 자리가 없었어요. 여기하고 저기가 다 극장이 있던 자리예요."
구로공단은 1989년 처음으로 전년도보다 수출액이 줄어든 이후 꾸준히 하락세를 이어간다. 95년엔 고용규모가 전성기의 1/3 수준인 4만명대, 98년엔 2만명대로 줄어들었다. 90년대 내내 내리막길을 걷던 가리봉동이 다시 기지개를 켠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디지털산업단지로 성격을 바꾼 것이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1997년 442개에 불과하던 총입주회사는 2000년 12월 712개로 늘었고, 지난해엔 7200개로 10년 사이 10배 이상 늘었다. 고용규모도 9만5000명에 이르러 전성기 시절에 다가섰다. 관리업체인 한국산업단지측은 올해 말 입주기업 8500개, 고용규모 11만명을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영화에도 반영돼 이영은 감독의 2005년 작품 <이대로, 죽을 순 없다>엔 구로디지털단지가 배경으로 나왔다.
이렇게 보면 가리봉동의 역사를 25년의 영광과 10년의 쇠락, 10년의 변화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5년의 영광과 10년의 쇠락, 그리고 10년의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