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은 평화를 사랑하는 휴머니스트였다.평생 스승 고능선의 가르침을 실천한 백범은 실천가이자 휴머니스트다.
이명옥
벡범 김구는 자신의 일생에 영향을 끼친 스승으로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와 고능선을 꼽는다. 백범이 평생 스승으로 삼았던 고능선은 백범에게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하여야 한다. 항상 무슨 일이나 밝혀 보고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의 첫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을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라고 가르치며 판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백범이 머리싸움이 아닌 발로 뛰는 실천의 삶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평생 스승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긴 데 있을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치하포 사건’으로 7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감옥살이를 하면서 가장 힘든 것 세 가지를,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을 받는 것, 굶기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과 다르게 우대를 하며 회유책을 쓰는 것이라 했다.
그 세 가지 중에서도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인간의 교만함과 이기심 그리고 우월감을 자극해 변절하게 만드는 회유책이고 실제로 함께 저항운동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한 수많은 동지들을 보면서 백범은 '비록 白丁, 凡夫처럼 낮은 자라 할지라도 一心으로 변절함 없이 애국심을 지키며 산다는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다스리려 호를 白丁의 白과 凡夫의 凡을 따서 白凡'이라고 지었다 한다.
사소한 욕망과 물질에 굴복하여 수없이 많은 오점을 남기는 현대 정치인들을 보면서 白凡 선생의 한결같은 심지가 더욱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다.
'自身을 이기는 者가 가장 强한 者'라고 한다. 백범은 ‘배우기는 어려우나 행동하는 것은 쉽다( 지난행이: 知難行易)’라는 행동지침을 지닌 실천가로 평생 실천적 삶을 살았다. ‘자신을 다스리는 자가 가장 강한 자’라는 말이 있다. 늘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에 몸을 굴복시키고 살았던 백범의 삶은 쉽게 유혹에 굴복하는 현대인들에게 말없는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나는 적성(赤誠: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首魁:악당의 최고 우두머리)를 죽이기로 맹세하나이다.'백범이 조직한 비밀테러 조직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면서 쓴 선서문과 일왕 히로히토를 암살을 위해 떠나기 전에 찍은 활짝 웃는 이봉창 의사의 모습은 커다란 여운을 남긴다. 백범 선생이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자 자신은 31년 동안 해보고 싶은 것을 다 해 보았고 의로운 일을 위해 떠나니 웃음을 보여달라고 했다고 하니 이봉창 의사의 호탕한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어쨌거나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 배후 인물로 지목된 백범 김구 선생은 현상수배되어 피신하는 신세가 됐다. 일제가 내건 현상금이 처음 20만원에서 60만원으로 뛰어 요즘 돈으로 치면 200억에 가까운 금액이 된다. 독립의 기개를 살린 두 의사의 의거가 일본에 비친 무게와 일제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백범 김구는 29살에 결혼했는데 몸이 약한 부인은 사고의 후유증으로 49살에 세상을 뜬다. 부인이 자신이 낳은 둘째 신(信)이 어려 시어머니가 양육하시기 힘드실 테니 고아원에 보내라고 유언을 했다고 하니. 자식을 희생하면서 나라를 위해 애쓰는 백범의 삶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 어미로서 가슴 아팠을 심정을 헤아려본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아내를 잃은 백범이 쓴 비문에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음 / 최준례 묻엄 / 남편 김구 세움’ㄱㄴㄷㄹ 순서대로 1234를 나타낸다니 4222년 3월 19일에 태어나고 대한민국 6년 1월 1일 사망하였음을 알리는 저 특별한 비문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면 아이들은 수수께끼를 푼 듯한 만족감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