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나홀로 입학생이 된 예슬이와 세인이. 예슬이는 왕산초등학교, 세인이는 왕산초등학교 고단분교의 나홀로 입학생이다. 단촐하게 공동 입학식을 치렀다.
최원석
흰 눈이 그대로 남아있는 학교 운동장에 차를 세워두고 교무실을 들어섰다. 새로 전근 온 선생님은 자신의 의자를 내어준다. 소파에 앉아 두리번 두리번 주위를 살피는 사내아이.
"너, 누구니?""입학할려고 왔는데요.""엥, 오늘 예슬이 혼자 입학한다고 했는데. 너두 여기 다닐 거니?" "아니요, 저는 고단분교에 다닐 건데요. 입학식은 여기서 한대요." "아 그렇구나. 너는 이름이 뭐니?""손세인요, 손세인."왕산초등학교 고단분교는 해발 660m인 삽당령 너머 강릉시 행정구역의 서쪽 끝으로, 정선군 임계면과 접해 있다. 세인이가 입학하면 6명이 전부인 학교. 예슬이 입학식 취재에 세인이 입학식은 덤이 됐다.
입학식은 내외빈 소개도 없이 단촐하게 시작됐다. 재학생 15명, 고단분교 교사 2명, 왕산초등학교 교사 3명, 교무부장, 교장, 그리고 세인이 가족 3명, 예슬이 부모님과 이웃어른 1분이 전부다. 도회지 큰 학교 같으면 재력 있는 운영위원장에 정치인들 화환이 앞자리를 메웠을 텐데 쇠락하는 학교에는 축전 한 장이 없다.
"기다리면 친구들이 올 거예요. 지금은 혼자지만 누군가 이사와서 함께 공부할지도 모르잖아요. 저는 여기를 절대 안 떠날 거예요. 너무 좋아요."
예슬이의 어린 마음에도 '떠난다'는 것이 자리하고 있나보다. "절대 안 떠날 거"라는 말은 떠나보냄을 겪어본 마음에서 나온 말일 게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함께 살던 이웃들이 떠나가고 덩그러니 남은 빈집을 매일 같이 보고 살아야 한다. 밤에 불이 켜지지 않는 시커먼 덩치의 빈집을 옆에 두고 사는 사람들. 아이 울음소리가 끊어진 마을이기에 어디선가 아이들이 주렁주렁 달린 가족이 이사 오기만을 기다린다. 예슬이네 가족이 3년 전 이 곳을 찾아들었듯이 누군가가 이사 오기를 기다린다.
도시로 도시로, 사람들은 떠났다예슬이 혼자 입학하는 왕산초등학교는 강릉에서 임계와 정선을 오가는 길가에 있다. 강릉에서 서쪽으로 백두대간 골짜기를 따라 삽당령을 오르다 나타나는 평지.
이 곳 지명이 말해주듯이 고려 말 공양왕 원년(1389)에 신우가 신돈의 아들로 몰려 이곳에 유배되고 그 여종과 생계를 잃고 떠돌아다녔다고 하여 왕산이라 불리게 됐다. 1980년대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을 때에는 강릉까지 1시간이 넘게 걸리던 거리였기에 이 마을 사람 모두가 동창생이고 초등학교를 마치면 나란히 담 하나 넘어 중학교를 다녔다.
1985년 강릉시의 상수원인 오봉댐이 들어서면서 논밭과 집이 물에 잠기게 된 이웃들이 먼저 떠났고, 농촌에서 희망을 찾지 못한 젊은이들이 떠나면서 아이들이 줄기 시작했다. 다른 농촌도 마찬가지겠지만 1990년대 들어 왕성·목계분교가 폐교되면서 학생들이 본교로 오기보다는 강릉으로 떠났다.
이곳은 4월이 돼야 농사일이 시작된다. 지난번에 내린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쌓여 있다. 산골짝이기는 하지만 면사무소·치안센터·우체국·농협·보건소·중학교도 있는 제법 큰 면소재지이다. 6개리에 830여 세대가 살지만 초등학생은 15명이 전부다.
아이들이 있는 집들은 모두 강릉으로 떠났다. 농사일을 해서 얻는 수입으로는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고, 또 돌볼 시간도 없기 때문이다.
어둠이 걷히면 시작해서 해가 져야 끝나는 농사일, 농토가 적으면 남의 집 논과 밭에서 품을 팔아야 하는 형편에 이 마을 아이들은 사교육을 받지 못한다. 강릉까지 20㎞, 30분 남짓 거리지만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데려올 여가가 없다. 수익을 따지는 학원이 차량 운행을 해 줄리 없는 일.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차를 모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친구 떠난 운동장에서 남매는 종일 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