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님을 사랑하는 마음누님 화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테야요!
박봄이
또 우리 배추도사, 돈 문제에 매우 민감하지 않은가. 그 산삼줄기 같은 눈썹을 삐닥 치켜세우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 양반이 집주인만 몇십년이라 일단 들어오기 전까지는 인자함을 잃지 않는 치밀함이 좀 있다.
"그… 그려, 그럼 내일 아침 은행 문 열자마자 보내! 꼭이여!"경태는 배추도사의 인자함 사이로 숨겨진 살기를 느꼈는지 흠칫 하더군. 훗!
"그럼 옥탑 색시가 11일 날 나가니께, 총각은 12일날 들어오는 걸로 얘기된 거지?"이미 배추도사에게 날짜 맞춰 들어올 사람을 구할 거라 말해두었기 때문에 배추도사도 확인차 물어보았다. 그런데!
"아… 그런데 제가 직장을 다녀서요, 12일은 곤란하고 그 주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들어왔으면 하는데요."뭐야, 이거!! 갑작스럽게 말을 바꾸는 경태. 순간 식은땀 한 방울이 척추에 '송글' 맺히는 게 느껴졌다. 대충 상황을 눈치챈 여우 같은 배추도사, 실금실금 웃으며 말을 하기를,
"뭐, 난 상관없어. 총각이 토요일에 들어오나 일요일에 들어오나 비는 날짜는 색시가 메워주면 되니께. 알아서 혀. 그리고 직장 다니면 아무래도 평일은 힘들지, 안 그래? 색시가 보증금에서 일주일치 빼고 나가면 되겠네."이야, 배추도사! 난 이미 나갈 사람이니 들어올 사람한테 맞추겠다 이거지? 경태는 배추도사와 통하는 게 기쁜 듯 내심 흡족한 미소를 띄웠다. 이봐, 그거 한 때거든?
"저기요, 분명히 제가 조건으로 단 게 날짜 아니었나요? 이러시면 안 되죠.""그건 그런데 제가 직장을 다니잖아요.""제가 날짜 안 적었나요? 집 보러 오시기 전에 날짜 보고 오셨을 거 아닙니까!"혈압이 올라 저승 가실 지경이었지만 그래 뭐, 까짓 거 일주일치 해봐야 몇만 원 더 버리는 셈치자는 생각부터 들었다. 어서 도망가는 게 상책이다!
"그럼, 제가 보증금에서 일주일치는 내고 갈게요, 대신에 이사 가는 날 보증금 주실 수 있으시죠?""뭔 소리여, 내가 그걸 왜 줘? 난 돈 없어. 이 총각이 들어와서 돈을 줘야 내가 보증금에서 제할거 제하고 주는 거지.""그럼 저는요?""이사 가서 일주일 후에 받아가면 되잖여."허… 보증금이 일이백도 아니고 이사갈 집의 보증금은 뭐로 메우라고 저렇게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것일까. 지금 생각해도 뒷목이 뻣뻣해지고 어질, 현기증까지….
"잠깐 저랑 얘기 좀 해요."일단 배추도사 앞에선 내가 불리했기에 경태를 데리고 나왔다.
"둘이 알아서 결정혀, 난 몰러."후후… 저래서 속 편한 게 집주인이라지.
경태야, 누나 오늘 <오마이뉴스> 사회면 탄다경태와 난 옥상으로 올라왔다. 오장육부를 한 바퀴 휙 돈 듯 깊은 한숨이 후욱~ 하고 쏟아졌고 머릿속엔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아까 계약서 적을 때 보니까 나이도 나보다 5살은 어리던데 말이야, 나이도 어린 녀석이 들어올 때랑 나갈 때 말이 이렇게 달라? 대놓고 울릉도 가서 오징어에 엿 말아 잡수란 소리 아니야, 이거. 아… 저 종자를 어떻게 하지? 하아.. 누나가 올해 서른만 안됐어도 경태 넌 이미 세렝게티의 톰슨가젤처럼 악어밥 되는거다.'
"그냥 포기해주세요. 이러실 줄 알았으면 날짜 맞춰주신다는 다른 분들도 줄 서서 기다리시는데 약속 안 잡았어요.""그래도 제가 제일 먼저 왔고 집 주인분도 아무 말 안 하시는데 왜 그러시나요."뭐라? 갑자기 눈 앞이 핑!
"당신은 당신 생각밖에 안 해?!"아악, 나도 모르게 그만 언성이 높아져 버렸다. 경태는 흠칫! 놀라며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요즘 안 그래도 인상이 안 좋아져서 '도를 아십니까'도 흠칫 피하는데, 이 누나가 기어이 <오마이뉴스> 사회면 떠야겠느냐.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엇, 이 말은 아닌데…. 봉하마을 내려가신 어르신의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가 왜 지금 튀어나오냐, 미치겠네.
"예?" 경태는 당황하는 듯 했다. 그렇지, 니가 잘못하긴 했어도 부끄러운 일까진 아닐 거야. 음, 뭐라고 수습을 하지?
"아… 아니, 나이 그만큼 먹었으면 약속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알 거 아니에요? 아무리 온라인 상 세입자끼리 직거래라 해도 그렇지, 서로 예의는 지켜야지, 안 그래요?"에라이~ 화도 내던 놈이 낸다고. 내가 왜 녀석 앞에서 온라인의 예의와 약속의 소중함을 설명하고 있는 거야, 젠장.
그런데 의외로 경태는 진지하게 경청했다. 고개도 끄덕이며 마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이랄까. 그러는 동안 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주제는 끝도 한도 없이 거창해져 부동산 투기와 반지하·옥탑인들의 생활, 마릴린 명박님의 이야기까지 주절대고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제가 큰 실수를 했네요. 저의 작은 행동이 이렇게나 큰 파장이 올 줄 몰랐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쪽 분께 큰 짐을 떠안겨드린 게 되었네요. 네, 제가 포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밤도 늦었는데 실례 많았습니다. 집주인분께는 계약서 파기해달라고 말씀드려 주세요, 이사 잘하시기를 바랍니다."더이상 밑천이 떨어져 할 말도 없을 때쯤, 경태는 다행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매너있게 물러서 주었다. 뭔가 굉장한 에너지를 소비해 승리를 얻어낸 것 같기는 한데 이 밀려드는 공허함은 뭐라지. 결론이 너무 건전하잖아.
경태가 돌아가고 기운이 쏙 빠져 털썩 주저앉은 꼬냥이. 으미, 두 번 이사하라면 나는 못하것소.
아무튼, 경험도 해봤으니 또 이런 일은 없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나의 착각! 이번 이사 최대의 하이라이트, 꼬냥이가 거품 물고 이삿짐을 모두 던져버린 사건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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