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덧 해가 뉘엿뉘엿지고 바람이 차가워지자 마음이 급해졌다. 최소한 가게라도 나와야하는데. 점심을 달랑 빵 하나 먹고 여태 아무것도 못 먹은 것이다. 물로 어느 정도 배를 채웠지만 자전거 여행자에겐 절대 역부족이다. 배고픈 게 가장 서럽고 신경이 예민해지던 때인데. 이대로는 무리라 판단되어 할 수 없이 히치바이킹(필자 주:히치하이킹+자전거로 필자가 응용한 단어)을 시도하기로 했다. 도로 한가운데서 손을 흔들어보았지만 아무도 나를 바라봐 주지 않는다. 휑한 도로에 마음은 더 텅 비어 버렸다.
기득권층의 윤리의식을 어줍잖게 들먹이니 괜히 입만 삐죽 나왔다. 소외계층을 향한 자비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나는 더욱더 힘껏 차량을 세우기 위해 처량하기 그지없는 필사의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추위와 배고픔, 인간의 본연적 환경이 위기에 처할 경우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자전거 여행자의 한계이자 서러움이다.
몇 대가 먼지바람만 남기고 그냥 지나치더니 드디어 한 대가 저만치 앞에 멈춰 섰다. 9회말 역전만루찬스를 잡은 심정으로 헐레벌떡 허겁지겁 차로 돌진했다. 그런데 이 황량한 도로 한 가운데서 웬일로 멈춰섰나 싶어 봤더니 역시나 맨정신으로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젊은 친구 세 명이서 탄 트럭인데 차 안에 술 냄새로 진동했다.
하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절대 안 되었다. 무조건 'OK!' 꽥꽥 소리 지르며 차에 올라탔다. 어렵게 잡은 이상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절박함이 탐탁찮은 일련의 상황을 잠잠히 의식 아래로 뭉개버리는 효과를 낳은 것이다. 어찌되든 나를 둘러싼 운명이 내민 손을 잡아보는 것이다. 운명은 개척이나 순응이 아닌 어떻게 흐름을 타느냐이다.
젊은 친구들인 그들은 자기들끼리 계속 웃으며 이야기하는 중에 연신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떼까떼(Tecate) 맥주를 들이켰다. 내게도 맥주를 권했지만 완곡히 사양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니 이 좋은 맥주를 왜 안 마시냐는 김새는 표정들이다. 왁자지껄 수다를 떨며 간단없이 마셔 비워낸 캔을 그대로 창 밖으로 던져버린다. '양심도 없나….' 국토사랑, 나라사랑의 자세가 안 된 녀석들이다.
그러면서 내가 알아듣지 못할 얘기를 끊임없이 물어왔다. 잔뜩 취한 와중에 그리 건전치 않은 얘기들이 오가는 것 같았고 그러면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 나를 조롱하는 느낌이 은연 중 전달되었다. 이건 한눈에 봐도 양아치 기질이 다분한 녀석들이었다. 기분이 확 나빠지면서 순간 정의의 분노가 솟구쳤다. 이대로 있으면 혹 사단이라도 날까봐 이쯤에서 그들에게 확실히 나의 색깔을 보여주기로 했다.
"이봐! 세상에나! 오, 이런 그것 참 재밌는 얘기로군. 푸하하하."
나는 더욱 더 해맑은 얼굴로 그들의 이야기에 배꼽을 잡으며 장단을 맞췄다. 내용을 간파하지 못한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실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사람도 없는 한적한 도로에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나를 내팽겨 쳐 놓고 물건들을 강탈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세 명은 좀 버겁지 싶다. 그러기에 안전지향주의로 가자면 더욱 그들의 분위기에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큰 소리로 과장되게 웃음을 만들어내며 휙휙 지나치는 일몰의 풍경을 바라보자니 나는 왠지 내가 인조인간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서글픈 생각이 치밀어 올라 더욱 위태로운 광대극을 펼쳐야 했다. 심히 젠장할 일이다.
겁 많았던 새가슴이 활짝 펴졌다. 다행히 무탈하게 과야마스에 당도한 것이다. 뒤끝이 좋으니 만사가 좋게 느껴진다. 호의를 베풀고 거들먹거리는 그들의 인사를 사뿐히 받아주고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도저히 텐트 칠 기분이 안 났다. 오랜만에 찬바람에 고생해 몸이 탈날까 싶어 간만에 숙소를 잡기로 했다. 우선 짐부터 정리하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갑자기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전거 여행하세요?"
갑작스런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단정하고 또 얌전하게 보이는 한 소녀가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아, 네. 자전거 세계일주 중이에요. 여기 오는 내내 사람도 안 보이고 배도 고프고 해서 일단 도착은 했는데 숙소를 구하려구요."
그녀는 내 얘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자기도 자전거에 관심이 많고 취미활동으로 동호회에 가입해 즐겨 탄다면서 나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왔다. 간단한 사항과 행적에 대해서 대답을 하고 짐들을 점검하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주변에 호텔이든 모텔이든 싼 숙소 있나요?"
"음,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를 따라 오세요."
그녀는 도로 맞은 편 호텔로 나를 데려다줬지만 가격이 생각보다 비쌌다.
"250페소라. 100페소 정도의 숙소는 없는 건가요?"
"비싸죠? 그렇다면 우리집으로 갈래요? 우리집에서 하룻밤 정도 자는 건 괜찮아요."
"그 쪽 집이요? 괜찮아요?"
"물론이죠."
그녀는 처음 본 낯선 동양청년에게 예상치도 못한 제안을 해왔다. 미국에서는 적지 않게 이런 경우가 있었지만 멕시코에서는 누가 먼저 초대하는 게 처음이라 생경스러웠다. 더욱이 밤에 만난 이름 모를 소녀가 말이다.
"아니, 처음 만난 낯선 남자를 집에서 재워도 괜찮냔 말이에요."
그녀는 별 걸 가지고 호들갑이라는 투로 웃어버렸다. 그녀의 이름은 자스민. 그리고 열여덟. 자전거가 좋아 자전거 여행도 많이 다니고 집에도 자전거와 각종 장비가 있다고 소개하는 학생이었다. 그녀의 제안에 따라갈까 돌아설까 순간 고민을 많이 했다. 인상은 선해보였지만 어쩌면 혹시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짠 함정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를 유인한 뒤 갑자기 수 명이 나타나 강도행각을 벌일 개연성도 상상 속에선 충분히 농후해 보였다. 행여나 내가 잘못될 가능성, 무엇보다 강도사건 이후 멕시칸들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고 있어서 그리 맘이 편칠 않았다.
"어때요?"
판단을 기다리는 그녀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의 눈은 어떤 의심의 싹도 피울 수 없을 만큼 순수해 보였다. 하지만 함부로 낯선 사람을 따라가는 판단도 그리 명쾌해 보이진 않았다. 잠시 고민한 끝에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저…."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2008.02.18 11:49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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