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기군 깃발. 8기군의 전신 4기군 깃발. 남(藍)색기, 백색기, 황색기, 적색기, 이 깃발 가장자리에 장식을 더한 4기군 깃발과 함께 8기군이라 한다. 심양 고궁에 진열되어 있다.
이정근
청군 진영을 빠져나온 임금이 뒤를 돌아보았다. 압록강을 건넌지 7일 만에 도성을 유린해버린 팔기(八旗)가 노을에 펄럭이고 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허겁지겁 도성을 빠져 나올 때는 한강이 결빙되어 얼음 위로 건넜지만 이제는 날이 풀려 배를 타야 한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만여 명의 백성들이 쏟아져 나와 울부짖으며 길을 메웠다.
"임금님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용골대가 군병을 이끌고 길을 텄다. 채찍이 바람을 갈랐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한강에 얼음은 풀렸지만 차가운 날씨다. 헐벗은 살갗에 채찍이 닿으니 피가 튀었다. 하늘로 치솟는 선홍색 핏줄기가 노을에 유난히 붉어 보였다. 채찍이 춤을 추었지만 백성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겨우 길을 뚫어 송파진에 도착했다. 나루터는 썰렁했다. 도성을 외곽 방비하던 조선 수군 진영은 괴괴했다. 경강 삼진(三津) 중의 하나였던 송파진나루터가 이럴 수 없었다. 수군진영은 청나라 군에 의하여 불태워졌고 군졸은 도륙 되었다. 임자 없는 나룻배 두 척이 물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름없는 민초들의 피를 토하는 절규당시 한강에는 삼개나루, 광나루, 노량나루 등 백성들이 이용하는 나루터도 있었지만 한강진을 비롯한 동작진, 양화진 등 수군진영이 있었다. 송파진나루터는 어영청 관할이었다. 도승관이 경찰 임무를 수행했다면 수군은 말 그대로 군대였다. 세곡선을 보호하고 병조 소속 전령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임금이 배에 올랐다. 백관들이 서로 타려고 어의(御衣)를 잡아 당겼다. 그들의 옷자락을 백성들이 잡아 당겼다. 배가 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백사장으로 올라올 지경이었다. 평소 같으면 임금님의 용안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불경이고 처벌의 대상이 된다. 배에 겨우 올라 탄 당상관들이 민초들을 향하여 호통을 쳤다.
"무엄하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주상전하 가시는 길을 막는단 말이냐?"
백성들의 입가에 조소가 흘렀다. '오랑캐에게 무릎 꿇은 왕이 무슨 놈의 나라님이냐?'는 눈초리였다. 나룻배는 탔지만 사공이 없다. 내관들이 노를 저었다. 배가 서서히 움직였다. 당상관들이 배에 매달리는 백성들을 뜯어내고 발길로 찼다. 물에 빠진 백성들이 허우적거렸다. 그들을 뒤로하고 배는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