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들어 산방산 근처를 지날 무렵 경사는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날뿐만 아니라 일주 기간 내내 크고 작은 오르막은 계속해서 뒤를 따라오는 지원차량에 너무 애타는 눈빛을 보내게 만들었다. 정말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정말 한발만 더, 한발만 더 가자는 심정으로 땅만 보고 페달을 밟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힘들 때마다 옆에서 응원해주던 나의 첫 번째 짝 웅철이는, 봐주는 법이 없었다. 정말 힘들어서 헥헥거려도 절대 걸어가자는 말 하지 않고, 잠깐 발을 내려놓고 쉬기라도 할라치면 여지없이 채근을 해댔다. “타, 타, 조금만 더 가면 돼, 타”를 외치며 더욱 몰아세웠다. 그러나 그 채근이 더 힘을 내고 남들 다 걸어 올라가는 오르막길에도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고 갈 수 있었던 힘의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무심하게 말해 놓고도 내가 힘들 때의 페달을 밟는 버릇까지 파악해서는, 경사진 길에 자신도 힘들텐데 숨을 헐떡이며 내 등을 밀어주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제주 일주 중 가장 경사가 심했던 산방산 코스는 결국 꼭대기에 조금 못 미처 몇 걸음 걸어 올라가고 말았지만, 그 경사에도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밀어주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중문 관광단지를 지나, 둘째날 아늑한 숙소에 도착했다. ‘남쪽나라 빌’. 이름도 멋지다. 천제연 폭포 근처에 있는 숙소에 도착해 라면으로 간단하게 간식을 먹고 외돌개와 천지연 폭포를 승합차로 관광했다.
숙소로 돌아와 정말 잊을 수 없을 만큼 푸짐한 회와 매운탕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 처음 먹어본 살아 있는 전복 맛도 잊을 수가 없다. 이번 일주 내내 유명하기로 소문난 맛집만 찾아다녔다. 밀면, 회, 오징어 물회, 국수, 곱창 불고기 전골 등 맛집 탐방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일주 내내 식사시간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셋째날. 개인적으로 이날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처럼 허하고, 몸에 힘이 축 빠지고 현기증이 나려 했으나 이틀 열심히 달려온 것이 아까워 땅만 보며 악착같이 달렸던 것 같다. 이때에도 나의 두 번째 짝인 태훈이가 정말 큰 힘이 되었다. “누군가 뒤에 있어야 마음이 든든하다”고, 계속 뒤를 돌아볼 때마다 어디서 왔는지 늘 그 자리에 있어줘서 든든했다. 밀어주는 연습한답시고 나를 실험대상으로 삼기도 했지만, 그것도 모두 나를 돕고 싶은 마음에 그런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일주를 끝까지 계속 해야 하는 건가?
힘겹게 셋째날 일주를 마치고, 너무 힘겨워 방에 오자마자 쓰러져 누워 있으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 왜 왔는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가?”
“이렇게 무리하면서까지 이 일주를 계속 해야 하는 건가?”
복잡 다양한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결론은, 내가 원해서 왔다는 것. 또한 내가 일주를 시작하면서 했던 수많은 다짐 중 하나가, 임진각까지 통일 자전거를 다녀온 친구의 말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는 극한상황이 오지 않는 이상 봉고차를 타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굳게 다짐을 하고 마음을 추스렀다.
동료들이 바베큐 파티 준비를 할 동안, 너무 찬 손발에 한기가 느껴져 먼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또 다리에 한 가득 파스를 붙이고 민박집 마당으로 나갔다. 찬 바람이 코 끝을 스쳤지만 맛있는 흑돼지고기와 숯불 냄새 그리고 자전거 일주팀의 행복한 웃음소리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다시 한번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남은 일주도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다짐을 했다.
넷째 날(28일) 아침은 성산일출봉에서 일출을 보며 맞으려 했으나 비가 와서 열심히 올라간 일출봉에서 기대했던 일출을 볼 수 없어 많이 아쉬웠다. 이날은 비가 생각보다 많이 왔다. 비옷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무섭기도 하고 비바람이 몰아쳐서 두렵기도 했지만, 우리는 비를 맞으면서도 일주를 멈추지 않았다. 날씨에 굴하지 않고 모두 달렸다.
이 때 뒤쳐지던 많은 아이들을 밀면서 일주를 계속 했던, 후배 석종, 웅철, 현수에게 정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돈내고 참가한 참가자였을 뿐인데도 자전거를 타는 동안만큼은 모두 똘똘 뭉쳐 책임감 있게 참여해주어 정말 고마웠었다. 물론 자신들도 누군가를 위해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 뿌듯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분명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다.
성산일출봉에서 제주시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비바람을 뚫고 달려가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신발과 옷이 모두 비에 젖었지만 그만두자는 사람 하나 없이 묵묵히 자신과 싸움에 집중하던 그들! 정말 아름다웠다! 그렇게 비와 바람과의 사투를 마치고 처음 출발한 제주시로 들어왔을 때는 정말 그 벅찬 감동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비바람을 뚫고 제주시에 도착
그 순간을 잊지 않으려고 얼마나 많은 사진을 찍었는지 모르겠다. 정말 힘들었던 지난 4일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내가 정말 제주도 자전거 일주에 성공한 거 맞는지 믿기지가 않았다.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벅차올랐다. 임진각에서 간접적으로 느낀 감동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이게 자전거 타기의 매력인가. 임진각까지 통일자전거에 참가해서 죽을 고생을 했던 석종이, 수진이, 웅철이가 또 다시 제주 일주에 참가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통일 자전거보다 기간과 거리가 짧았지만 직접 내 발과 다리로, 내 힘으로 달려온 것이기에 그 감격스러움은 표현할 길이 없었다. 내가 이렇게 고생을 사서 한 경험이 처음이기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고생을 함께한 우리 모두가 참 아름다워 보였다.
그렇게 자전거일주가 끝나고 제주YMCA에서 제주의 현대사에 관한 강의를 들었는데, 조금은 낯설게 들리는 제주의 역사를 ‘오순국’ 강사님께서는 간략하고 섬세하게 설명해주셔서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마치 방청객처럼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들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먼저 강의를 듣고 제주 일주를 시작했더라면 더 많은 것들이 마음에 전해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제주에서 마지막 밥, 자전거 일주를 끝낸 안도감과 한라산 등반에 대한 긴장감이 교차했다. 저녁 프로그램 시간에는 서로에게 전해줄 롤링페이퍼를 쓰며 서로에 관한 감상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또 다른 도전의 시작, 한라산
마지막 날 프로그램은 한라산 등반. 우리가 한라산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일까? 자전거일주 4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 걸까? 무슨 배짱으로 기초체력이 부족한 우리가 마지막 날 한라산 겨울 등반을 하겠다고 계획을 세웠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해야 하는데, 한라산 등산에 대한 긴장감이 은근히 자리 잡고 있었는지, 뭉친 다리를 어루만지며 새벽 2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잠을 설치고 한라산 입구에 다다랐을 때에는 정말 떨리고 겁이 났다. 조금씩 날리는 눈발에 비옷까지 구입해서 입고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걷기 쉬운 길이 지루하게 이어졌지만 중반부터는 정말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도 아파오기 시작했다.
힘은 들었지만, 경남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설경에 감탄을 하며, 눈도 입에 넣어 먹어보고 계속 이어지는 똑같은 풍경에 투정을 하기도 하며 진달래 대피소까지 올랐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이 펼쳐지는 새하얀 눈을 맞은 나무들, 눈이 아니라 얼음알갱이가 비옷에 떨어지는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결국 진달래 대피소까지 갔던 것이다. 너무 감격에 겨워 주위에 사람이 없어 셀프타이머 맞춰놓고 사진을 찍었다.
너무 힘들게 올라간 길이라 그런지 등산객 중 한 분이 “수고했어요” 하는데 그 말 한마디가 너무 뿌듯하고 감사했다. 진달래 대피소에 도착해서 먹은 컵라면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앞머리 옆머리까지 꽁꽁 얼어붙은 채로 라면을 참 맛있게도 먹었다. 9시 30분에 대피소에 도착해 30분 정도 휴식하고, 10시에 다시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정말 휴식한 후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은 어떻게 걸어 올라갔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진달래 대피소까지 왔던 길보다 훨씬 경사가 심한 길을 앞사람 발과 땅만 보고 정말 부지런히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포기하고 싶다”, “그만 올라갈까”, “그냥 내려갈까”하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 이번에 한라산을 마지막으로 올라간다는 생각으로, 사진이나 TV로만 보던 백록담을 보고야 말겠다고 이를 악물고 올랐다.
꼭 한 번 더 다시 오르리라
나중에는 힘든 고통을 잊으려고 속으로 노래를 수십 곡 부르고 머릿속을 비우고 무거운 발을 한걸음 한걸음 옮겼다. 정상에 다다를수록 눈보라는 더욱 거세지고 경사도 더욱 심해졌다. 마치 한라산이 그만 올라오라고 밀어내는 바람인 것 같았다. 눈이 너무 많이 온 탓에 등산로 난간에 매인 밧줄이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아 손을 뻗어도 잡을 데가 없어 거북이걸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올라 결국 정상에 도착했다.
조금 과장하면, 숨 넘어갈 고비 몇 번 넘기고 도착한 정상 ! 그 감격스러움은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벅차오름은 정말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 사람마음이란 참 알 수 없다. 올라갈 땐 정말 두 번은 안 올테니 이번에 정상에 다녀와야 한다는 심정으로 올라갔는데, 내려와서는 친구와 한라산에 꼭 한번 다시오자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
다녀와서 내가 미니홈피에도 썼던 글인데, “하이킹 완주보다 한라산 완등보다 감동적인 건 너무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다는 것”이다. 억지로 자전거 타라고, 억지로 누군가 하라고 해서 시작한 일이 아니다. 스스로 선택, 스스로 의지로 시작한 도전에 성공한 그 기쁨이란 정말 잊기 힘들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내 안에 가득 채웠다.
2008.02.14 18:44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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