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밤 서울 숭례문에서 화재가 발생해 시민들이 무너져 내리는 숭례문을 바라보며 안타까워 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유성호
숭례문(이른바 남대문)은 대한민국의 상징이며 우리 마음 속의 '국보1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반론을 꺼내는 것 자체가 매우 불쾌한 일이 될 수도 있으며 지탄의 대상이 될 위험마저 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뒤엎을 수는 없는 일이며, 이 차에 해묵은 논쟁을 마무리할 시점이 왔다고 생각해서 감히 꺼내든다. 이른바 국보논쟁이다.
'숭례문'은 뭐고 '남대문'은 또 뭘까?숭례문은 언제부턴가 남대문으로 불리며 이제는 숭례문보다 남대문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썩 개운치 않다. 우리 민족은 옛부터 음양오행에 매우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직접적으로 어떤 방향을 가리키기보다는 그것과 의미가 같은 다른 말을 사용했다.
이를테면 '남대문'이라고 직접적으로 표시하지 않고 '숭례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숭례문의 '례'는 다섯 가지 도리[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중에서 '禮'에 해당한다.
선조들은 이 다섯 가지 도리를 서울의 사방에 세웠다. 보신각(普信閣)을 중심 축으로 4대문을 '인(동)-의(서)-예(남)-지(북)'(흥인문(興仁門)-숭례문(崇禮門)-돈의문(敦義門)-숙청문(肅淸門))라는 이름을 붙였다(북문만은 예외이다). 하지만 일제가 이 이름 대신 그냥 '남쪽을 향하는 문'으로 바꿔 버렸다. 이 때문에 조선의 정기를 훼손했다는 논란이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
국보1호 성립 과정 역시 이에 못지 않다. 일제는 1933년 8월 9일 제령 제6호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공포하여 이듬해에 이를 시행하게 되는데,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남대문을, 보물 2호로 동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 숭례문이 국보1호가 된 것은 매우 자의적이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당시에나 지금이나 국보에 대한 명확한 판단기준이 없었고, 그 대신 행정편의상으로 줄세우듯 국보의 호수를 배분했다. 광복 이후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공포할 당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1963년 728점에 이르는 지정문화재 중 116점을 국보로 지정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