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저동굴울릉도 남양. 수심 15미터 t산호가 늘어져있는 동굴 바깥으로 돌돔한마리가 카메라 앞을 지나가고 있다.
장호준
다이빙이 끝나고 출발지로 돌아오면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들리는 곳이 있다. D.P.E.점(Developing, Printing & Enlarging, 일반적으로 현상소를 뜻함)이다.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찬 가슴을 안고 우리는 필름을 맡기러 갔다. 우리만이 아니었다. 카메라에 중독 된 일련의 사람들은 마약에 취한 것처럼 필름 현상소로 직행을 하는 것이다. 인화된 사진이 나오기 전까지 사람들의 바람은 장밋빛이다.
"요번에 있잖아요, 물고기가 새우를 먹으려는 순간, 입으로 들어간 바로 그 순간, 한방 찍어버렸지, 오매 미치지, 이것만 나온다면 쥑이는 건데."
물론 사진이 나오고 나서 그 사람으로부터 그 사진에 대한 어떤 결과도 들을 수가 없었지만, 듣고 있는 사람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더 했다. 35mm 표준렌즈로는 스트로보가 미치는 범위 내에 다이버를 구겨서 넣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인화 된 사진을 찾아서 콩닥 이는 가슴을 진정하며 구석으로 가서 부리나케 사진을 훑어보면 실망으로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돌아 나와야했었다. 사진 전면에 걸쳐 막걸리를 먹다가 재채기 한 것처럼 뿌연 점들이 덮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답답해서 선배 '찍사'들에게 물었다.
"이거 왜 이래요?"
"부유물 때문에 그렇지요."
글쎄 그걸 누가 모르나? 누구도 제대로 답변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가르쳐 주기 싫어서 그러는가 싶어서, 그 말을 물을 때면 그 사람의 눈빛까지 살피기도 했었다. 카메라의 매뉴얼도 구하지 못하던 때였다.
시야가 5m도 안 나오는 2~30m의 수심에서 애초에 사진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매주 맑은 바다를 찾아 멀리 갈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야가 흐린 날, 바다위에 섰을 때의 그 아득함이라니…. 물먹은 카메라를 방파제의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 친 L이 말했다.
"나 이제 안 해, 나 정말 안 해."
수없이 현상소를 드나들며 '똥 씹은' 얼굴을 하다가 카메라까지 물에 침수되자 그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른 것이었다. 나도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 시원하게 한 번 '때기장'을 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L의 눈치를 봐 가며 부서진 카메라를 챙겼다. 카메라는 고쳐야 하고, L은 다시 카메라를 들고 물로 들어 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발기인모임이 열리고 한 달 후 우리는 클럽을 출범시켰다. 나도 두말없이 합류했다. 전국에 걸쳐 있던 아는 '찍사'들이 모여들었다. 제주도, 영덕, 마산, 부산, 울진, 포항. 매년 두 차례 이상씩 정기 다이빙을 가지며, 매월 한 차례 물(수)요일 날 모임을 갖기로 하고 그 때 마다 사진 콘테스트를 하기로 방침도 정했다. 물론 매년 한 번씩 전시회를 열기로 합의도 봤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듯이 일 년이 다 가기도 전에 회원의 숫자가 반타작이 되었다. 그 때의 발기인이 지금은 몇 명 남지도 않았다. 물론 새로운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직업도 다양했다. 백수에서부터 교수, 의사, 상인, 회사원, 다이빙 숍 주인 등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그렇듯이 개인의 직업이나 나이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들은 같은 다이버였으며 같은 '찍사'였기 때문이었다. 물은 우리들의 종교였고 우리는 열렬한 신자들이었다.
그 때부터 십 몇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사람 사는 게 그렇듯이 당연히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었다. 서로 뒤돌아 선 사람들도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은혜를 입었다. 30대 새파란 나이에 북망산으로 간 사람도 있고 60이 넘은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분도 있다. 모두가 소중한 인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