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사적 257호 운현궁이다. 인사동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운현궁이다. 고종 임금이 탄생하고 즉위하기 전인 12세까지 살았던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면서도 궁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 였다.
이곳을 걸으면 왠지 마음이 한가하고 여유로워진다. 이곳이 한때를 풍미했던 서슬퍼런 흥선대원군이 살았다는 사실을 빼고 나면 여염집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솟을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객을 맞는 것은 사랑채 노안당이다. 대원군이 섭정하던 때 주요 개혁정책을 논의하던 곳이다. 가운데 건물은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가 운현궁의 살림을 맡아서 하던 노락당이다. 맨 끝에 있는 건물은 노락당이다.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가족들의 크고 작은 잔치는 모두 이곳에서 치러졌으며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도 이곳에서 치렀다고 한다.
운현궁은 비 내린 날 찾으면 좋다. 겹차양으로 길게 늘어뜨린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마치 거문고 가락처럼 마음을 적신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담장을 따라 심어진 시누대 잎에 눈이 떨어져 쌓이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즐겁다.
대원군은 자작시 '아소당(我笑堂'의 끝 구절에서 호기롭게 말한다. "긴 세월을 알맞게 그린다면 이 생 저 생이 죄다 가소롭다"라고. 그러나 진정 가소로운 건 생애의 한순간에 반짝 빛났다가 사라지는 이슬 같은 권력일 뿐이다.
이렇게 눈 내리는 길을 걸어서 운현궁·탑골공원·경인미술관을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서울을 삭막한 곳이라 치부해 버리지만, 눈 내리는 날에 바라보는 서울은 마치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뒤돌아볼 새도 없이 세계화라는 담론에 떠밀려 가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이 '낡은 것'들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 시대에 이 오래된 명소와 유서깊은 건물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신이 처한 시대의 상황에 따라 사물이나 문화유적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근본을 지향하는 마음마저 달라지지는 않는다. 세월이 흘러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나중인지를. 무엇이 흘러가는 것이며 무엇이 맨 나중까지 남을 소중한 것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