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제자리인 것 같지만 돌아보면 훌쩍 앞에 와있는 게 인생
이러한 광활한 지역에서는 사방의 70km 정도까지가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에, 앞을 보고 달리면 가도 가도 제자리인 듯한 느낌이 든다. 아침에 시작할 때 보았던 저만큼의 거리를 하루 종일 달려도 도달하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분명 눈에 보이는 곳인데 이렇게 멀단 말인가?
이렇게 자전거를 타는 것 자체가 힘들어 지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여러 상념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사람 사는 것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까?" 늘 사는 것이 똑같고, 늘 제자리인 것만 같고,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어쩔 땐 오히려 퇴보하는 느낌도 들지만, 실상은 지금처럼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달려온 길을 돌아보면 어느새 훌쩍 앞으로 나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머리를 땅에 처박고 아무 생각 없이 페달을 밟았다.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 어찌 되었건 멈추지만 않으면 자전거는 앞으로 나간다. 나가지 않는다고 조바심 낼 필요도 없고, 많이 나아갔다고 자만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때로는 쉬어 가고 때로는 끌고 가고, 빠르든 느리든 멈추지만 않으면 자전거는 간다. "인생에 비유하면 페달을 멈추는 건 죽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가는 것이 나의 몫이고, 그 순간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만 다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지나온 길! 잘 살았다, 못 살았다"의 판단 결과는 사람들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 내가 내리는 것이라는 기준만 있으면 된다.
이런 저런 상념 속에서 페달만 밟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가 육체의 고통을 잊게 해 준다는 것이다. 갑자기 앞서 가던 영아가 뒤돌아보면서 말을 건넨다.
"이곳의 기후나 지형을 봤을 때,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신을 믿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아."
이러한 자연의 광대함 앞에서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선, 신의 존재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의지의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글쎄, 한 놈의 트럭 기사 녀석이…
영아가 말한다. 점점 더 이란이 좋아 진다고. 처음엔 나갈 때마다 머리에 스카프를 뒤집어 써야 하고, 무엇 하나 하려고 해도 너무 조심스러워서 정나미가 뚝뚝 떨어졌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이 나라가 너무너무 좋아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점점 이란이란 나라에, 페르시아의 문화에 빠져 들고 있다. 알면 알수록,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새로운 이란의 진면목을 보게 되는 것 같다. 그냥 일반적으로 바깥 세상에 알려진, 이란의 편협한 정보만을 놓고 이란을 판단해서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이슬람 원리 주의의 나라, 미국에 의해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테러 국가로만 지목되어 알려진 나라 이란. 과연 그럴까? 우리는 입을 모았다.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말이다.
40km 넘어서고 나서부터, 우리는 엄청난 바람을 만났다. 다행히 맞바람은 아니지만, 동에서 불어오며 우리의 자전거 우측을 맞받아치는 바람 때문에, 내리막길에서도 속도가 나질 않았다. 자전거가 휘청휘청할 만큼 심한 바람이다. 자전거에 돛을 단다면 아마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귓전을 때리는 바람의 윙윙거림 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 엄청난 바람 속을 뚫고 50km를 달려야 했다. 사실 말이 자전거를 탄다는 거지, 거의 걷는 것과 똑같은 속도로 이동을 했다. 이 구간을 지나면서 녹음기에 목소리를 녹음했지만, 바람소리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천둥 번개조차 한 번도 무섭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건만, 이놈의 바람은 가히 공포의 대상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특히나, 이런 바람을 막아줄 게 아무것도 없는 허허 벌판, 사막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나마 모래폭풍이 아닌 게 천만 다행이다. 아직도 50km를 더 주행해야 하는데, 이 엄청난 바람이 불어대는 광활한 지대는 어디가 끝인지 모를 정도로 끝없이 뻗어있다.
그런 바람이 끝날 무렵, 웃을 수 없는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다. 한 놈의 트럭 기사 녀석이 영아와 나와의 간격을 이용해, 영아에게 몹쓸 짓을 하고 달아난 것이다. 1초 정도쯤, 심각한 건 아니었다. 워낙 차량의 왕래가 드문 곳이기에 저기 저 앞쪽으로 트럭 한 대가 멈춰 설 때 이미 느낌이 좀 이상하긴 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건데 나 또한 뜨거운 햇빛을 가리느라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우린 둘 다 여자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먼저 그 트럭을 지나칠 무렵엔 밖에 나와 있던 트럭 기사와 직접 눈이 맞았고, 그는 차량을 정비하는 척 했기에 난 그저 그 트럭이 고장 난 것으로만 생각하고 지나쳤다. 심지어 서로 인사까지 건넸다. 내 뒤에 오던 영아와의 간격은 약 30미터 정도였다.
내가 먼저 그곳을 지나친 잠시 후 꺄악 하는 영아의 비명소리가 황량한 공기를 가로질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전거를 팽개치고 스프링이 튀어 나가듯 녀석을 향해 돌진했다. 순간, 적잖게 떨어진 거리였지만 허둥대며 차로 돌아가는 녀석의 뒷모습이 보였다.
차에 시동조차 꺼놓지 않았는지 트럭은 순식간에 출발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달려오는 나를 정면에서 깔아뭉개려는 듯 덤프트럭 핸들을 확 꺾어 내 쪽으로 돌진해 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맘모스 같은 트럭에 깔릴 뻔 했다.
그러는 와중에 조수석을 살펴보니 다른 여자가 타고 있는 게 아닌가?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니. 우리는 둘 다 할 말을 잃었다. 얼마 전 만난 여자 여행자를 통해 거리에서 몸을 더듬는 치한의 옆에 그의 와이프도 버젓이 있었다는 피해 당사자의 얘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리 문화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이 모든 것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이라 길옆에 있던 '짱돌'을 주워들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게 너무 후회가 된다. 유리를 깨버리고 달려오는 차를 세웠어야 했는데…. 총이 있었더라면 돌진해 오는 녀석을 그대로 쏴 버리는 거였는데….
똥 밟은 셈 치고 잊어버리려고 했지만 은근히 약이 오르고 자꾸 화가 난다. 다시 만나게 되면 죽을 줄 알라! 영아는 국이의 싸움 실력을, 한번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면서 아쉬워했다.
영아가 말했다. "이란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워낙 아프칸이나 파키스탄 등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란에 많이 들어와 있으니까." 이란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를 깨트리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여하튼 다음부턴 더 조심해야 할 것이다.
저 멀리 카비르 사막이 보인다. 저 모래바람 속을 과연 자전거로 가로지를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엄청난 바람 한가운데로, 저 뿌옇게 보이는 사막 안으로 들어간다.
덧붙이는 글 | 국이랑 영아의 자전거로 가는 세상구경 - 긴 여정(이란,인도/네팔,터키편)- 은 작자의 홈페이지(http://www.bikeworldtravel.com/)와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그리고 SLR CLUB(http://www.slrclub.com/)에서 연재가 이루어 집니다. 오마뉴스는 매주 토요일에 업데이트 됩니다.
2008.01.20 10:55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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