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드디어 얼룩송아지 엄마 품에 달려듭니다.
신영미
잠시 집 주변을 거닐고 싶었다. 돌마가 동행해 준단다. 막 대문고리를 열고 나가려는데 돌체와 마주쳤다. 그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미혼의 30대 초반으로 차돌 같은 인상에 뭐가 그리 바쁜지 늘 분주해 보이는 라다키 남자다. 왠지 한 장소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바람 같은. 그는 내가 괜찮은지를 '틱' 하니 묻고는, 몇 걸음 못가서 다시 멈춰 어디 가는지를 묻고는 '휭' 하니 그대로 안채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보기에 그는 이곳 게스트하우스 운영에 그리 관심 있는 것 같지 않다. 마치 돌체 자신도 이곳 게스트하우스의 투숙객인 듯이.
아는 것이란 아침 산책길. 동네사람들이 쭈그려 앉아 지하수에서 물을 긷는 모습을 보니 아직 상수도가 안정되어있지 않나보다. 가이드북에 이곳 연평균 강수량이 84mm밖에 안된다고 쓰여 있었다. 집 근처에 보리밭도 보인다. 보리가 마치 잡초처럼 자라는 구획 정리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밭이었지만, 보리알이 제법 싱그럽고 탐스럽다. 초록빛 잎을 달고 있어 아직 수확기가 되려면 한참 남은 거 같다.
“돌마도 젬마처럼 이곳에서 일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아니예요. 저는 엄마, 아빠랑 고향에서 사는 게 좋아요.”
“외진 곳보다는 사람들도 많고 새로운 것도 많고 변화랄까? 그런 것을 즐기고 싶지 않아?”
“처음에는 그런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새롭다는 것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란 걸 알았어요. 전 내일 돌아가요. 젬마를 걱정하시는 엄마를 대신해서 잠시 들른 거거든요.”
“으음…그래…그런데, 돌마는 라다키 사람으로 인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글쎄요. 너무 달라요. 제가 인도사람이란 생각, 별로 하지 않아요.”
“그래? 마하트마 간디알아?”
“몰라요. 하하.”
“그럼. 네루? 타고르는?”
“몰라요. 하하.”
“좀 이해가 안돼네. 왜 모르지?”
“그건, 간단해요. 만나보지 못했으니까요..”
“앵? 그렇게 되는 건가? 그럼, 그 사람들이 누군지는 들어본 거야?”
“물론이지요.”
“하하. 그렇구나. 너무 재밌어. 그래. 돌마 말이 맞아. 그래 안다는 것은 최소한 그런 거겠지. 나. 뭔가 돌마에게 배운 느낌이야. 하하.”
‘아는 것’이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몸으로 아는 것인 모양이구나. 그를 직접 만나 서로 마주할 때 시작되는 거겠구나. 그럼, 아는 건 모두 실제인 거로구나. 그렇게 몸소 겪어 아는 것은 얼마나 분명하고 진실할까? 아는 것이란 어렵지 않은 것이리라. 얼마나 쉬운 것일까?
“그럼, 하나 더. 돌마는 나를 알아?”
“그럼요. 라다크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죠?”
“하하하. 맞아. 알고 싶어. 하하.”
뜻밖의 대답이 신선하다. 외국인여자, 게스트, 직업 뭐 이런 걸 말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날 알아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는 것이란 알아주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그’라는 실체가 있어야 했다. 내가 그를 알고 그에게 알고 있음을 전해주어야 하니까. 그는 그 마음을 받는다. 그는 자신이 이해받고 있음을 안다. 이해하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고 했던가? 그럼 그는 자신을 더 잘 알도록 기꺼이 펼쳐 보여주리라.
두 사람은 이제 서로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애틋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는 것이란 그런 것이었다. 놀라웠다. 이렇게 쉬운 것을. 웃음이 절로 나온다. 돌마의 눈빛이 가깝게 느껴지고 그녀의 호흡이 또한 멀지 않았다.
“돌마는 영어를 참 잘하네? 어디서 배웠어?”
“돌체가 가르쳐줬어요. 돌체는 여행시즌이 끝나면 영어교습소를 열어서 무료로 라다키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왔어요.”
“그래? 보기보다 돌체가 생각이 깊은 갑네?”
“하하. 보기에는 어떤데요?“
“하하. 좀 껄렁껄렁한 껄렁패같잖아?”
“하하.”
살구 따는 날오후나절에 다시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 한 가운데 나무벤치 옆에 서서 빙그르 돌아본다. 적당한 간격으로 심어진 10여그루 넘는 살구나무들의 뻗은 가지마다에 주렁주렁 살구 알들이 햇살을 받아 홍조를 띠면서 반짝인다. 삶은 달걀 노른 자위를 빼닮은 모양이어서 푸웃 웃었다. 잘 익은 살구의 달콤한 향이 코를 간지른다.
고개를 들어 미루나무 꼭대기 초록잎 사이로 바람이 이는지 잎들이 찰랑찰랑 빛 장난을 한다. 장미 넝쿨 끝에 붉은 장미 한 송이가 기품이 있는 자태로 꼿꼿이 하늘을 향해 있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 일컬어 주리라. 탐스러운 다알리아 꽃송이에 얼굴을 묻고 부비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오늘은 살구 수확하는 날. 이웃집 사람들이 모두 나와 여기 마당의 살구를 딴단다. 살구의 품종은 두 가지. 알이 비교적 작은 것은 익을수록 아주 빨갛게 되고 단맛이 매우 진하다. 알이 비교적 큰 것은 노랗게 익어가는데 약간 신맛과 버무려져 시원하고 물이 많았다. 이곳에서 아무 때나 주워 먹은 살구는 얼마나 내게 힘을 주었던지.
기꺼이 한몫 거들기로 했다.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사다리가 동원되고 푸대와 종이박스가 등장하고. 아저씨 한 분이 사다리 위에 올라 살구가 매달려있는 나뭇가지를 잡아 손이 닿도록 늘어뜨려 주시면 똑똑 땡글땡글한 살구를 따는 것이다. 머리위로 살구가 하나 툭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노란 살구가 파란 하늘 아래 반질거리고 초록 잎들 사이로 오후 햇살 그 순해진 빛들이 마구 쏟아진다. 눈물이 났다. 눈이 부신 탓이리라.
살구나무 위에 올라가 보고 싶어졌다. 조심스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니 한결 날아갈 거 같다. 내려다 보니 한여름에 때이른 풍성한 수확의 기쁨으로 모두들 표정이 싱글벙글 밝다. 담박에 빈 푸대가 차례대로 살구알로 가득 찼다. 이것들은 내일 아침이면 시장에 내다 팔려질 것이다.
무공해 살구 1kg이 단돈 600원! 그리고 땅에 떨어져 쩍 하고 금이 가는 녀석들은 모두 잼이나 쥬스로 되살아날 것이다. 물론 그러기 전에 오늘 수확의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이 먼저 떨어진 살구 알을 주워 실컷 배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흐물흐물하지 않고 싱싱한 살구 알이 함초롬히 벌어지면 우리들 입도 함초롬히 벌어지고 어느새 입가에는 입안에 들어간 살구에서 나온 달초롬한 단물이 뚝뚝 묻어났다. 하늘은 여전히 눈부시게 파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