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랍니다

등록 2008.01.13 18:25수정 2008.01.13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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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고 나니 몸이 나른합니다. 그래서 남편을 따라  장을 보러 가려던 마음을 접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많이 힘들었던 어제 일이 떠오릅니다.

 

어제는 20여년을 가족처럼 지내는 남편의 후배가 집에 찾아왔습니다. 결혼 전부터 형수 형수하며 살갑게 구는 후배지요. 사업을 하는 후배는 비교적 시간이 자유로운 편이라 삶에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우울증으로 10년 가까이 고생을 하고 있지요. 우울증 약을 10년째 먹으면서도 자기 일에 열심이고 주변에 봉사하며 늘 쾌활하고 세상을 재미있게 살려고 노력하는  이 후배가 왜 우울증을 달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작년 9월, 나의 병세가 악화되어 폐에서 간까지 암세포가 전이되는 상황을 맞고 보니 나도 남은 삶을 더 활기 있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명씩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바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처음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바로  이 후배입니다. 우리는 후배 사무실 근처에서 만나 함께 초밥을 먹었습니다. 내 건강 상태를 후배에게 전하고 앞으로의 계획도 이야기했습니다. 후배는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신나게 놀자. 다음 달엔 라이브 까페에 갈까?"

"조오쵸. 형수님, 바다 낚시는 어때요?"

 

후배는 금방 얼굴을 폈습니다.

 

밥을 먹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그 순간도 나는 몹시 힘이 들었습니다. 숨이 가빠 음식이 잘 넘어가질 않고 암세포에 막힌 기도 사이를 뚫고 겨우 목소리를 내느라 아주 작고 쉰 목소리였지요. 그렇지만 '바쁠텐데', '귀찮아하면 어쩌나?'하는 생각으로 전화 한 번 하지 못하고 살다가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 맛있는 점심도 먹고 담소도 나누니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우리는 한 달 후를 약속하고 헤어졌지요.

 

누가 내일 일을 알 수 있을까요?

첫 만남 이후 석 달 사이에 후배의 아버님이 돌아가셨고 우리 딸이 죽었습니다. 딸의 49재를 치르고 나니 12월도 다 가고 있더군요. 후배가 기다려졌습니다. 지친 육신의 피로를 후배와 앉아 웃음으로 훨훨 날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후배는 생뚱맞은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형수 ~ 나 또 술 취했네~."

 

문자를 보는 순간 괘씸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안 해 본 반말로  댓글을 보냈습니다.

 

"자알 했다. 그래서 어쩌라구?"

 

속이 시원했습니다. 더 이상 상대의 아픔을 들어주고 보듬어주기만 하던 예전의 내가 아니었습니다. 니가 어린애냐? 니 앞가림 니 알아서 해라는 식으로 막말을 했습니다.

 

"히 히 형수 삐졌구나. 그러니까 내가 보고 싶단 말이지?"

"그래 이놈아. 언제 올래?"

"토요일이 어때요? 수,목에 사무실 이사라서."

 

사실 토요일은 남편과 조용히 쉬고 싶고 늦둥이 조카 돌잔치도 좀 걸리고 해서 얼른 대답을 못했습니다. 결국 후배에게 좋다는 회신을 보내긴 했지만 막상 토요일이 되자 기다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왠지 못 온다는 연락이 올 것 같기도 하고. 금요일 저녁에 배탈이 난 남편이 늘어져 하루 종일 잠만 잤기 때문이죠. 나도 맥없이 졸음만 왔습니다.

 

그런데 오후 5시쯤 막 잠에서 깨어나는데 후배 부부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좀 당황했습니다. 얼른 이부자리를 정돈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별로 반가운 줄도 모르겠고 뭘 어찌해야 할 지 모르는 중에 숨만 답답했습니다. 후배 부부와 저녁을 먹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계속 서성거렸습니다. 숨쉬기가 아주 불편했기 때문이죠.

 

밖에 나가 찬 공기도 마시고 주차장 산책도 하고 옆 방에 가서 평소 하던 운동을 해 보았지만 별로 나아지질 않았습니다. 남편이 저녁 상을 차려 같이 밥상에 앉았는데 김칫국 두어 숟갈을 먹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안되겠기에 현관 벽에 방명록을 써 놓고 그만 가라고 했습니다.

 

이사 온 집에 그 동안 다녀 간 사람들이 낙서처럼 남겨놓은 방명록 옆에 후배는 "선배, 형수 쌀랑해요" 이렇게 써놓고 나가면서 "형수 만나러 온다고 신경 좀 썼는데 나 어때요?" 합니다. 근사하다고 칭찬을 하며 옷 매무새를 만져주었습니다. 엘리베이터까지 배웅을 하며 "시선을 밖으로 돌리지 말고 나만 봐" 그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마음은 여리고 욕심은 많고 인정은 받고 싶은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서 외로웠던 삶. 바로 나와 후배의 삶이었습니다. 시선이 밖으로 향해 있으니 남들 잘 난 것만 보이고 남들 따라가느라 용을 써 보지만 자신은 언제나 미흡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하고도 늘 자신감이 없고  자신이 실망스러웠습니다.

 

다행히 나는 병이 깊어가면서 나의 욕심을 보기 시작했고 나만의 장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누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인정을 하니 세상에 부러울 게 없습니다. 부모님의 크신 사랑이 새록새록 느껴지고 남편의 애틋한 사랑이 더없이 따듯합니다. 부족하기만 하던 자식도 예쁘기만 합니다. 똥귀저기 차던 그때처럼요. 그래서 남편도 자식도 자꾸 품에 안게 되나 봅니다. 이렇게 변해 가는 내 모습이 사실은 나의 참 모습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순간 나의 소중함, 나에 대한 감사, 세상에 대한 감사가 나를 행복하게 하지요.

 

일요일인데 교당에도 못 갔구나 생각하는 순간 나는 또 다른 상념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교무님께 부탁해서 발표 시간을 달라고 하자. 가족 같은 교도들 앞에서 나의 2007년을 이야기 하자. 1월부터 집없는 고통이 시작되었고 2월부터 딸 다연이의 화상 때문에 3개월을 마음 고생했고 6월부터 호흡이 곤란해졌으며 9월부터 간으로 전이 된 암세포가 몰아오는 통증에 밤잠을 설쳤노라고. 11월에 다연이가 하늘로 떠나는 날벼락을 맞았고 12월 22일에 49재를 마쳤노라고. 그리고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함을 알게 되었노라고.

 

눈물이 사정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왜? 왜 나는 여러 사람 앞에서 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가? 모르겠다. 그냥 하고 싶다. 그러면 가슴이 시원할 것 같다. 할 수 있을까? 교무님께 법문 시간을 할애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을까? 목이 말라도 물 달란 소리도 못하던 내가? 여러 사람 앞에 꼭 내 이야기를 해야 해?

 

버릇처럼 나의 욕구를 누르고 있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냈습니다. '더 이상 하고 싶은 일을 미루지 마. 용기를 내. 그래 용기 있게 사는 거야. 해 보는 거야. 주춤거리다 후회하는 일 다시는 하지 마.'

 

내게 속삭이고 나니 힘이 납니다. 겁이 나도 망설여져도 해야 할 일이 분명합니다. 이 다리를 건너야 내 삶이 행복으로 이어질 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만족스런 삶이 이어지는 사이에 암세포는 저절로 물러날 것입니다. 나를 보며 후배가 용기를 내었으면 좋겠네요.

 

"아자자 힘내자. 우리."

 

2008.01.13 18:25ⓒ 2008 OhmyNews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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