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늘 새로운 세계를 동경한다.
신영미
‘버스표’ + 마음 다짐 = 렛츠 고! 버스스탠드 앞 중국풍의 자색으로 깔끔하게 단장한 식당으로 들어섰다. ‘옴마니 반메흠’의 스님 독경소리가 낮게 흐르고 있다. 쌈뚝 한 그릇을 주문해놓고 지금의 한가함을 물끄러미 바라다 본다.
‘그런데 레(Lhe)에서 뭘 하지? 그러고 보니 고산증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구나.’
여행에서 정직하게 내 힘으로 걷는 것과 묻어 따라다니는 것은 이렇게 달랐다. 이제는 다시 하나씩 확인하고 챙겨야 한다. 그것이 때론 힘들고 귀찮지만, 그렇게 찾아 가는 길의 끝에서 해가 지고, 그 지는 해를 바라보며 따뜻한 불빛 따라 몸을 누일 수 있는 방에 들어섰을 때 희열 또한 얼마나 컸던가?
다행히 2시 30분발 표를 525루피에 구입했다. 여행은 ‘표’를 끊는 것부터 실질적으로 시작이 아닐까 싶다. ‘표’를 구해야만 여행은 현실의 힘을 얻는다. 버스표를 손에 넣었으니 이미 레에 도착한 것과 진배없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 레가 가까워오고 있었으므로 이제부터 마음 가운데 레가 자리 잡을 것이다. 허나 쉽지 않을 터. 킬롱에서 1박 하는, 그러니까 길 위에서 1박2일 40시간을 보내는 긴 버스여행. 얼떨결에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맥간의 상글리라에서 스치듯 만난 적 있는 두 명의 여교사와 두 명의 대학생으로 구성된 한국 여행자 팀을 다시 만났다. 같은 버스란다. 내심 잘됐다 싶다.
고산증에 대비해 미네랄워터 세 통과 과일 그리고 아스피린을 샀다. 이제 돌아가 배낭을 챙겨 곧장 다시 나와야 한다. 공영버스 스탠드는 네루공원에서 가깝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삼림보호구역을 통해 거슬러 올라가고 싶다. 이만한 전나무숲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진한 초록물이 숲에 가득하다.
오! 친구여!숙소로 돌아오니, 심부름하는 꼬마가 쪼르르 냉큼 다가오더니 어느 한국 여자가 찾아왔더란다. 이 꼬마, 이미 체크아웃하고 떠난 걸로 이야기했댄다. 이런! 정연이닷! 간발의 차이로 어긋난 걸로 알고는 얼마나 낙담했을까? 얼굴은 봐야할 것 아닌가? 언제냐니깐 30분 전이란다. 그렇다면, 아직 있다! 서두르면 만나고 갈 수 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날 때 가슴의 맥박수가 빨라지고 호흡이 고주파가 된다.
부리나케 뛰쳐 올라간다. 문들이 활짝 열려있고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 활기를 되찾은 듯 인도 주방장과 주인 대리인의 종종거리는 잰걸음! 저깃다! 정연이닷! 발견의 기쁨이란!
“정!연!아!”
“까약!”
“아앙! 반가워!”
“아이고 야아! 가버린 줄 알았어!”
“어엉엉! 오늘 자기 젤 예뻐 보여!”
우는 건지 웃는 건지 헷갈리는 소리를 내며 부둥켜안고 통통통 뛰면서 깔깔거리다가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들을 느끼고는 그제야 법석을 떤 소란을 거두고 서로 팔을 풀고 떨어졌다.
“소개할게. 이 분이 산악팀 대장님!”
“아!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 아침 떠나셨다는 소식 듣고 허탈해 하고 있었어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허허.”
“네. 늦어져서 많이 걱정이 되었어요. 소식을 전할 방도도 없고. 대장님께서 이래저래 힘드셨을 거 같군요.”
정연이가 대신 그간의 일들을 설명한다.
“말도 말아. 네팔에서 트레킹도 너무 힘들었는데 포카라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비가 어찌나 정신없이 쏟아지는지 트레킹 길이 완전히 끊기고 다리가 무너져서 오도 가도 못했어. 비는 사정없이 위에서 찍어 누르지…. 탈진하는 대원도 생기고…. 죽었다 살아 여기 서있는 거야.”
“그랬구나…살아줘서 고맙다 친구야! 하하.”
“그런데, 그런 고생 끝에 낙이라더니, 안나푸르나 정상을 봤다는 거 아니니. 원래 그걸 보기란 신의 뜻이 아니면 어렵다고 하는데 말이야. 갑자기 비구름이 거치고 안나푸르나의 설산이 거짓말처럼 나타나는데…대단했어…대단했어.어휴!”
푸르르 실타래 풀리듯 안나푸르나의 설산이 그녀의 눈앞에 그려지고 있나보다. 살다보면, 절대 잊히지 않는 풍경을 만날 때가 있다.
대장님과 정연이에게 혼자 여행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었음을 알렸다. 말없이 팔짱끼고 계시던 대장님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며 격려를 해주신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잘 생각하셨어요. 만나자마자 이별이군요. 저희는 내일 이곳 마날리의 쏠랑밸리를 돌아보고 내일모레쯤 레로 올라갈 것 같아요. 일정표에 나와 있는 대로 레에 도착하면 샤힌 G.H 나 레인보우 G.H로 들어갈 겁니다.”
“네. 그럼, 레에서 우리 다시 만날까요. 재밌어요. 각기 가다가 점찍듯이 어느 지점에서 다시 만나는 거요. 제가 두 군데 게스트하우스에 메모 남겨 둘게요.”
“네. 그래요. 그때 만나서 이야기하면서 회포도 풀고요. 허허.”
여행에서 만난 것은 여행이 끝난 후에 돌아보면 늘 그리운 것들이었다. 얼마나 많은 순간들이 지금도 기억 속에 살아있는지! 그래서 나는 이 여행기를 쓴다. 여행 중에 나는 릴레이경주의 바통이었다. 나는 바통이 되어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네졌다. 그렇게 고비 때마다 잘 넘어가도록 도와주고 배려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분들을 감히 길동무라고 부르고 싶다.
그랬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관계나 형식을 떠나 왜 이리 하나 같이 동무같은지…. 왜 이리 말 한마디, 눈빛 손짓 하나에도 살갑고 애틋한지…. 그 때 대장님의 선한 얼굴과 눈가의 주름살에 걸쳐 흔들리던 미소가 내겐 꼭 그랬다. 비록 몸은 따로 가지만, 마음만은 함께였다.
정연이와 정연이 친구 희진씨와 근처 ‘피자 올리브’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간단한 점심을 하기로 했다. 실내보단 정원에 자리한 파라솔 달린 테이블이 좋았다. 햇살이 눈부시게 밝고 정원의 크고 작은 꽃들이 화사하고 발랄하다.
희진씨가 레모나와 고산병에 좋다는 이뇨제 다이아막스 약을 챙겨주며 고산증에 대비해 밥은 평소의 절반만 먹고 물과 과일을 주기적으로 자주 먹으라고 친절히 가르쳐준다. 정연이와 둘이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만, 가.”
정연이는
자꾸 따라 오며,
“조기까지만.”
“조기까지만” 한다.
이제 그만 가라고
돌아서 종종종
짐짓 서두른 체했다.
이제는 뒤에서 자꾸만
“잘 가!”
“잘 가!”
말이 따라온다.
그 말만은 차마 떨치지
못하겠어서 웃으며
데리고 내려간다.
꺾어지는
길 모퉁이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휑뎅그렁하다.
새로운 동행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