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병사의 희생을 기리는 기마상인 라이터 덴크말
김성호
식민지 종주국의 희생자를 기리는 '이상한' 나미비아박물관과 루터 교회 사이의 언덕 위에 백인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었다. 의아했다. 백인이 오른손에 총을 들고 말을 타고 있는 구리상이다. 나미비아를 위해 독립 운동을 한 백인을 기린 것인가. 궁금했다. 가까이 가서 보았다. 기마상 기념물이라는 뜻의 독일어인 ‘라이터 덴크말(Reiter Denkmal)’ 앞에 새겨진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다.
“헤레레와 나마족의 봉기과정에서 숨진 1628명의 독일병사와 4명의 여성, 한 명의 어린이를 추모한다.”도대체 누구를 기리는 내용인가? 세계 어디를 가도 식민 지배자의 사망을 기리는 구리상은 처음 본다. 독일 식민지배에 항거하다 숨진 나미비아의 헤레로와 나마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다. 누가 침략자이고 누가 주인인지, 누가 학살자이고 피해자인지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1904년부터 1907년 사이에 헤레로와 나마족이 빈트후크 북쪽 오카한자에서 일으킨 식민지배 투쟁 과정에서 독일이 저지른 인종말살 정책은 유명하다. 당시 독일에 의해 학살된 나미비아인은 7만5천명 이상이다. 독일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저지른 유태인 학살이 보다 먼저 자행한 헤레로족 인종말살은 ‘첫 번째 인종학살‘로 불린다.
당시 독일 점령군 사령관은 “독일 영토 내에 있는 모든 헤레로족은 무기 소지여부와 상관없이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우물에 독을 풀어 죽였고, 사막으로 쫓겨난 헤레로족은 물을 마시지 못해 죽어갔다. 데이비드 데이는 책 <정복의 법칙>에서 역사상 정복자에 의한 대표적인 인종말살 정책으로 다음을 꼽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과 1904년의 헤레로족 학살, 1915년 터키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학살, 1925년 쿠르드족 학살, 미국의 인디언 체로키족 학살, 호주의 태즈매니아인 학살 등. 스벤 린드크비스트도 책 <야만의 역사>에서 아프리카에서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저지른 흑인말살 정책인 “모든 야수들을 절멸하라”의 대표적 사례로 독일의 헤레로족 학살을 들었다.
학살자들을 용서할 수는 있어도 기념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독일군 기마상을 보면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미 독립이 된지 16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식민지배자의, 그것도 인종학살의 책임자들을 기리는 기념물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이유를. 물론 이 기마상은 1912년 당시 독일 총독에 의해 세워진 기념물이다.
루터교회인 크리스투스키르헤 안에도 당시 학살에 참여 했던 독일군 희생자의 명단과 이를 기리는 기념판이 있고, 독일 정복자로서 총독을 역임했던 쿠르트 본 프란코이스 구리상도 빈트후크 건설자라는 이유로 시내에 세워져 있다. 옛날 동물원이었던 주 파크에는 ‘전쟁기념비’가 있는데, 헨드릭 비트부이가 주도한 나미비아 해방봉기 때 이를 진압하다 숨진 독일병사들을 위한 추모탑이다.
북한이 건설한 나미비아 영웅묘지헤레로족이나 나마족 등 나미비아의 해방투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추모탑은 지난 2002년 8월에야 빈트후츠 시 남쪽 외곽 10km에 ‘영웅묘지(The Heroes' Acre)’가 조성되었을 뿐이다. 시 외곽에 있고, 여행정보 책자에도 제대로 나와 있지 않으니 찾을 여행객이 거의 없다. 나도 시간상 찾을 수가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웅묘지의 기념물은 모두 북한의 ‘만수대 해외프로젝트 회사’가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시내에도 멩기스투 공산정권 시절 ‘주체사상탑’을 지어주기도 했다.
빈트후크시가 펴낸 책자에 나와 있는 영웅묘지 기념탑을 보니 뾰족한 오벨리스크 같은 탑과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평양의 대동강변에 있는 주체사상탑의 모양과 비슷하다. 아디스아바바의 주체사상탑도 비슷하다. “나미비아의 모든 아들딸들의 피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나무에 물을 주었다. 그들이 흘린 자유의 피는 나미비아의 현재와 다음 세대에 의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는 나미비아 건국의 아버지인 삼 누조마의 자서전에 나와 있는 내용이 영웅묘지 기념탑에 새겨져 있다고 책자는 말한다.
수도의 중심가에 세워져 있는 기념탑은 나라의 역사이고 정체성이다. 정복자와 침략당한 자의 역사를 같이 보여주자는 취지인지, 아니면 독일로부터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 실익차원인지, 도대체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서울 한복판에 일본 총독과 일본군의 위령탑을 세워놓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더욱이 빈트후크 시내에서는 정작 헤레레족이나 나마족에 대한 희생 기념탑은 찾아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