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하게 맞는 새해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알게되는 것엔 젊음과 나이, 세월이 있다

등록 2008.01.04 15:33수정 2008.01.0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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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60세를 막 넘긴 지인 한 분은 시간이 아까워서 몇 년 전부터는 잠 자는 시간도 줄였다고 하십니다. 아직 기업체의 현역이면서 잠을 줄여가며 활동해도 거뜬한 그 분의 건강이 놀랍지만, 일부러 잠을 줄이지 않더라도 연세가 그쯤 되면 대부분 일찍 눈이 떠진다고 하지요.

 

아마도 생체 시계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시간 아까운 줄 알고 스스로 그렇게 움직이나 봅니다. 누리고 가지고 있을 때는 모르다가 소진하고 나서야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 중에 젊음과 나이와 세월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그 말이 그 말이지만, 그래도 왠지 청청한 ‘젊음’이 흘러 가 버렸다 해도 아직은 ‘짱짱한 나이’라며 시간을 옭아매는 시늉을 해볼 수도 있고, 그러다 급기야는 누가 봐도 시들한 때에 달하고 나면 ‘그래도 세월은 남아있지’하면서 자조를 할 수 있으니 일부러 ‘젊음, 나이, 세월’로 구분해 보았습니다.

 

시간의 소중함이 진정으로 와 닿는 때는 언제부터일까 곰곰 생각해 봅니다. 사람마다 모두 다르겠지만, 제 경우는 40이 되어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들자 망령‘ 보다는 한결 윗길 이지만,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에는 어쩔 수 없는 회한이 남습니다.

 

그렇다 해도 만약 누군가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 준다면 무작정 ‘좋아라’ 며 덥석 받아 안을 수 있을까 싶어집니다. 곰곰 생각하면 별로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젊은 날의 그 미열같은 들뜸과 다듬어 지지 않은 성정, 아슬아슬 부박한 언행과 미숙함 따위, 어느 것 하나 원만하지 못했던 그 시행착오 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말입니다.

 

"오늘 다음에 어제가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나온 시절이 좋았던 건 결코 아니지만 내가 이미 다 아는 일들이 닥쳐 올 테니 적어도 두렵지는 않을 거 아냐."

 

어느 소설 속 구절입니다.

 

어제의 시점에서 오늘의 예측불허를, 오늘 지금 이 순간에서 내일의 불확실성을 얼마나 힘들어 했으면 그 무력감을 차라리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벌써 다 알고있는 어제가 오늘 다음으로 왔으면 좋겠다고까지 표현했겠습니까.

 

저는 큰 도서관에 가면 묵은 신문 잡지를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몇 년 전, 혹은 몇 개월 전에 발행된 인쇄물을 뒤적이다 보면 전 세계나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나 사고의 결말을 놓고 이런 저런 예측이나 초미의 관심을 드러낸 기사를 발견합니다.

 

묵은 신문에는 지난 해 여름 아프칸에 인질로 잡혀간 사람들이 언제 풀려날지, 전원 무사히 돌아올지를 놓고 피를 말리는 내용이 있지만, 지금은 그 가슴 아픈 결말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서로 대통령이 되려고 이전투구 할 때는 도대체 누가 되려나 싶더니 이제는 다 끝난 이야기이고, 과거 미궁에 빠진 사건도 시간이 얼마간 흐른 후 백일하에 드러난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은 이미 결론이 다 난 일에 대해 전전긍긍하고 있던 옛날 기사를 읽다 보면 마치 미래 인간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간 것도 같고, 그 시점 속에서 노심초사하던 일의 결론을 이미 알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전지한 신의 관점을 누리는 착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젊음으로 되돌아간다는 것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묵은 잡지 속에 갇힌 혼돈과 혼란처럼 말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니 무작정 흘러간 세월을 아쉬워하기 보다 차라리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가 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세월의 긴 강, 어드메 강둑에 다시금 섰습니다. 그 유장함 앞에 이제는 담담해 질 때도 된 나이입니다.

 

새해 벽두, ‘그 거울’ 앞에서 이 희승씨의 ‘소경’처럼 ‘반갑지도 대견치도 않은 나이를 속절없이 또 하나 먹게 되는구나!’라는 ‘잠꼬대’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이 먹어가는 것도 가만 두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얼짱, 몸짱, 동안이니 하면서 저 같은 중년 여자들도 아랫배 나오고 주름 느는 것에 공포심을 느끼게 하는 요사스런 시절입니다. 이 나이에 예쁘면 얼마나 예쁘며, 동안은 또 무슨 동안입니까. 도무지 나이 값을 할 수 없도록 부추기는 세태에 살고 있습니다.

 

생체시계마저 각성을 일깨우고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은 소중한 시간이건만, 붙들 수 없는 안타까움이 단지 육체적 쇠락에의 미련일 뿐이라면 좀 저급하다 싶습니다.

 

정말이지 새해가 시작된 지금도 순간순간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진정 무엇을 소중하게 걸러내고, 무엇을 가차없이 떠나 보내야 할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덧붙이는 글 |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에도 실렸습니다. 

2008.01.04 15:33ⓒ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에도 실렸습니다. 
#신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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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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