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내다리.예전엔 강경천이 아래에 흐르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서민들의 요긴한 다리였지만, 지금은 다리가 다리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 11호)
송영대
옛날 미내다리 부근의 개울에 다리가 없어 늘 아쉬움을 느끼던 이곳의 마을 사람들이 돈을 걷어 두 마을 청년에게 다리를 놓게 시켰다고 한다. 다리를 다 놓고 보니 경비로 쓰고 남은 엽전이 약간 남아, 이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던 두 청년은 나중에 다리를 보수할 때 쓰기로 하고 남은 엽전을 모두 다리 밑에 묻어두었다고 한다.
얼마 후 다리를 놓았던 두 청년 중 한 사람이 우연히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좋다는 약을 다 써보았지만 병은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점점 심해졌다. 그러자 그의 다른 친구가 전에 묻어 두었던 엽전이 있음을 생각하고는 이것을 파내 친구의 병 치료에 쓰려고 다리 밑을 파 보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무리 땅을 파도 엽전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병든 친구는 병세가 더욱 위중해져만 갔고,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구렁이로 변했다. 그리고 집을 나온 구렁이는 미내다리 밑으로 스스로 들어가 흔적을 감추고 말았다.
이로부터 이상하게 이 다리는 점점 토사에 묻히게 되고 통행하는 사람들도 적어졌다. 그러고서 다시 상당한 세월이 지나게 되면서 미내다리는 거의 폐교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이에 일부 주민들은 다리돌을 마음대로 빼다가 집으로 가져가려고까지 했다. 그러자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들고 천둥이 치고, 이에 겁에 질린 주민들이 다시 돌을 갖다놓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천둥이 그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미내다리 돌은 구렁이돌이라 하여 누구든 함부로 손을 대거나 훼손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정월 보름날 이 다리를 자기 나이만큼 왕래하면 그 해의 액운이 소멸된다고 하고, 추석날 이 다리를 일곱 번 왕래하면 행운이 온다고 믿는다.
미내다리 전설을 생각해보니 내가 만났던 뱀이 바로 그 구렁이가 아닌가 싶다. 몇백년 구렁이라고 하기엔 작디 작았지만 간만에 온 길손이 반가워서 잠깐 얼굴을 내비치다가 이내 부끄러워 풀속으로 사르르 사라진 게 아닐까?
미내다리는 그 모습이 흡사 무지개 3개가 이어진 것과 같다. 이렇게 곡선으로 아름답게 건축한 다리를 홍예교(虹霓橋)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홍예교는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와 선암사 앞의 승선교, 그리고 수원화성의 화홍문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홍예교는 구조적으로도 안정되고, 또한 그 모습도 아름답기 때문에 예로부터 널리 이용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홍예교는 주로 조선시대의 중반이라고 할 수 있는 15~18세기에 지어졌다고 한다. 비교적 짧은 시기이기에 형태상으로 분류하기엔 어렵지만, 그 목적은 크게 궁전, 사찰, 성곽, 일반교량으로 나뉘어진다. 이 중에서 미내다리는 일반교량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일반인들의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만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경 사람들에게 오랜 사랑을 받았던 것이고, 그 늠름한 자태가 아직도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논산의 3대 명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은진미륵, 개태사 철확 등과 비교해서 이러한 점에서 미내다리는 더 서민적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 투박한 서민의 이미지보단 섬세하고 세심한, 그리고 부드러운 서민들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다리이지만 더는 다리가 아니도다다만 아쉬운 점은 이러한 미내다리는 더는 다리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강경천이 홍수로 불어난다고 하더라도 굳이 미내다리를 건널 필요도 없을 뿐더러 강경천과 약간 떨어져 있어 육지 내에서 육지와 육지를 연결하고 있으니, 꼭 외로운 섬 모양이다.
문화재를 안전하게 보존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문화재의 보존은, 그 문화재의 역할을 그대로 할 수 있게 해주고, 그게 안전에 이상에 없는 한은 더 그러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튼튼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문화재이기 때문에 박제되어 한쪽에 쓸쓸이 서 있으니, 그러한 점에서 위험하니 미내다리 위로 건너가지 말라는 친절한 안내판은 약간 얄밉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