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나긋나긋 조용하게 들려주는 우리 곁 동무들 백 가지 이야기입니다.
호미
- 책이름 : 백 가지 친구 이야기
- 글ㆍ그림 : 이와타 켄자부로
- 옮긴이 : 이언숙
- 펴낸곳 : 호미(2002.5.25.)
- 책값 : 8700원
12월 31일. 2007년 저물녘입니다. 전철을 타고 잠깐 서울 나들이를 합니다. 연신내에 있는 헌책방 한 곳에 들릅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옆지기 부모님이 살아가는 일산으로 전철을 타고 갑니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구파발을 벗어나면 땅위로 몇 정류장을 달립니다. 이때, 북한산을 끼고 우뚝우뚝 올라서는 아파트숲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서울 시내 산들은 일찌감치 아파트숲으로 덮였고, 이제는 서울 바깥 논밭 차례입니다.
논밭 농사가 아무리 보람이 있고 날마다 우리들은 밥을 먹고 산다고 하지만, 돈벌이가 되기 어려운 한편, 논밭으로 쓰면 땅값이 싸지만 아파트 짓는 회사에 팔면 몇 곱을 받을 수 있으니, 다들 손쉽게 땅부자가 되어 일 안 하고 돈굴리기 하는 쪽으로 마음이 바뀔 밖에 없습니다.
(98)
떠돌이 일꾼들의 친구는 술,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부르던 노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그 노래도 이곳저곳 여행하였지.옆지기네 부모님이 사는 집은 아파트. 우리 부모님이 살던 집도 얼마 앞서까지는 아파트. 우리 부모님은 1979년이었던가, 열세 평짜리 5층짜리 아파트에서 열세 해쯤 살다가 인천에서 처음으로 아파트 개발을 하며 새도시로 꾸린 연수동 아파트에서 1991년 여름부터 살다가, 용인에 있는 아파트로 옮기셨습니다. 그러고 지난 2007년 2월에 교직 정년퇴임을 하고는 음성 한켠에 전원주택을 마련해 옮겨 가셨습니다.
(93)
전철기의 친구는 이젠 끊어져 아무도 다니지 않는
철길에 피어난 잡초,
아마 거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들국화이겠지요. 아파트가 숲을 이룬 동네에서는 나들이를 다니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니, 나들이를 다닐 데가 마땅히 보이지 않습니다. 5층짜리 낮은 아파트에서 부모님하고 살 때에는 집 앞에 있는 바닷가에 놀러가도 되었고, 집 둘레에 있는 철길에서 놀아도 되었고, 나즈막한 아파트와 가까운 골목길이라든지 야구장이라든지 동인천이나 화도진이나 제물포나 주안 들로 걸어서 얼마든지 돌아다녔습니다.
그렇지만 연수동에서는 느긋하게 걸어다닐 길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옮겨가신 용인에서도 어디 나다닐 데가 없습니다. 명절맞이 하거나 제사 지내러 부모님 집으로 찾아가면, 하루 내 집안에 박혀서 텔레비전을 앞에 두고 모여앉기 빼고는 딱히 다른 할 일이 없습니다. 아침부터 낮까지, 낮부터 저녁까지, 뒹굴고 먹고 텔레비전 보고 잠깐 수다 떨며 웃고 떠들고 하면 하루는 훌쩍 저물어 갑니다.
(84)
씽씽 부는 바람의 친구는 진눈깨비 섞인 함박눈,
아, 다시 겨울이 ……아파트에 모였어도 이곳 나름대로 재미있게 놀거리 할거리 즐길거리 들은 있을 텐데, 저부터 다른 놀거리 할거리 즐길거리를 생각해 보지 않고 대뜸 거리만 두지 않았나 싶습니다.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며 나들이할 곳이 따로 없다면, 요 시멘트 높은 집에 박히면서도 함께 즐길 이야기거리를 찾을 수 있을 텐데.
(74)
제비의 친구는 모내기를 끝낸 논의 벼 포기,
파릇한 입들, 바람 따라 살랑인다.아파트한테 동무가 있다면 우리한테 골목길을 빼앗아간 자동차일까요. 자동차한테 동무가 있다면 크고 작은 벌레와 길짐승을 비롯해 우리들 사람조차 마음놓고 건너다닐 수 없는 까만 아스팔트길일까요. 아스팔트길한테 동무가 있다면 나날이 바닥나고 있는 까만 기름, 석유일까요. 석유한테 동무가 있다면 우리가 하루 한때도 잊을 수 없어서 꼭 껴안으려고 하는 돈일까요. 돈한테 동무가 있다면 우리들이 날마다 손쉽게 쓰고 버리는 갖가지 물건들, 공장에서 뽑아낸 물건일까요.
공장에서 뽑아낸 물건한테 동무가 있다면 이 땅 아이들이 아토피 피부병을 비롯한 갖가지 병을 앓게 하는 화학물질 담긴 항생제일까요. 항생제한테 동무가 있다면 우리 입에 맛깔스럽게 느껴지는 소시지와 튀김닭일까요. 소시지와 튀김닭한테 동무가 있다면 부릉부릉 씨잉씨잉 골목길과 찻길을 요리조리 헤집고 다니는 배달 오토바이일까요. 배달 오토바이한테 동무가 있다면 건수 올려야 할 때만 교통단속을 하는 순경일까요.
순경한테 동무가 있다면 길가에 버려진 어마어마한 담배꽁초일까요. 담배꽁초한테 동무가 있다면 그 옆에 비슷한 크기로 뱉어진 엄청난 침덩이일까요. 침덩이한테 동무가 있다면 바로 옆에 비슷한 크기로 눌려 있는 다 씹은 껌일까요. 다 씹은 껌한테 동무가 있다면 껌을 싸고 있는 비닐 껍질일까요. 비닐 껍질한테 동무가 있다면 비닐 껍질이 버려지는 쓰레기통일까요.
쓰레기통한테 동무가 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과자 껍데기를 길바닥에 휙 집어던지는 이 나라 젊은이들 손일까요. 아무렇지도 않게 과자 껍데기를 길바닥에 버리는 젊은이들 손한테 동무가 있다면 재벌회사 입사면접서일까요. 재벌회사 입사면접서한테 동무가 있다면 일류대학교 졸업장일까요. 일류대학교 졸업장한테 동무가 있다면 입시교육만 하는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 회초리일까요.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 회초리한테 동무가 있다면 공부 못한다는 소리를 듣는 아이들 말랑말랑한 볼기짝일까요. 공부 못한다는 소리에 비행청소년 소리까지 덤으로 듣는 아이들 볼기짝한테 동무가 있다면 당구장 큐대일까요. 당구장 큐대한테 동무가 있다면 중국집 짜장면 그릇일까요. 짜장면 그릇한테 동무가 있다면 한 번 쓰이고 버려지는 나무젓가락일까요.
나무젓가락한테 동무가 있다면 빈 종이상자와 고물을 주으러 다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낡은 끌차일까요. 끌차한테 동무가 있다면 새벽부터 늦은밤까지 쉼없이 짐더미를 안고 굴러다니다가 잠깐잠깐 할아버지 할머니가 쉴 때 걸터앉는 거님길 돌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