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청풍병자호란 당시 폭약에 불을 당겨 순절했던 김상용의 집터에 있다.
이정근
쉬고 싶었다. 그동안 몸과 마음이 많이 소진되었다. 걸출한 인물 이방원과 390일 동안 씨름했다. 천여 명이 넘는 등장인물들과 함께 1년을 보냈다. ‘태종 이방원’ 212회, 연재를 마치고 나니 그랬다. 그래서 모든 일을 덮어두고 산천경개를 돌아보며 좀 쉬고 싶었다. 이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연재 마감 이틀 후,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다. 일명 쫑파티다. 그동안 성원을 아끼지 않았던 독자들과 시민기자 그리고 상근기자 몇몇이서 아담한 2층 호프집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 만나는 분도 계셨고 낯이 익은 분도 있었다. 즐거웠다. 독자와 필자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소통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좋았다.
술이 몇 순배 돌았다. 자리는 즐거웠지만 모두가 한결같이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쌉싸름한 보리향과 가스가 섞인 생맥주가 목젖을 적셔도 상쾌한 기분만은 아닌 것 같았다. 대선 결과가 드러난 지 하루만이라 자연스럽게 정치 이야기가 화두였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리고 화살이 나에게 꽂혔다.
기다리는 재미가 없어졌으니 빨리 후속작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가지지 않은 아기를 낳으라는 것과 흡사했다. 되물었다. “누구로 하면 좋을까요?” 많은 인물이 등장했다. 세종도 있었고 광해군도 있었고 정조도 있었고 조광조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렇게 많으면 어떻게 써요? 한 사람으로 몰아주어야지.” “열두 명의 후보도 한 사람으로 몰아주었는데 투표합시다.” 누구의 제안이었는지 모르겠다. 즉석에서 구두 투표가 실시되었다.
후보자를 추천하신 분들이 천거의 변을 토하는 과정에서 소현세자가 다크호스로 등장했다. 업무마감 때문에 조금 늦게 참석하신 여자분의 추천이었다. 여성이기에 왕자에 호기심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소현세자의 진취성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날아 갈 것 같은 여성분이 소현세자를 추천하신 것이 의외였다. 하지만 소현세자를 추천한 그분의 눈동자는 야무져 보였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리고 결정이나 공표는 없었다.
소현세자 때문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모임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내 머리에는 온통 소현세자로 꽉 차 있었다. 터질 것만 같았다. 도덕성에 흠결이 있는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은 이 시대정신과 소현세자. 뭔가 흐름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머리만 더욱 아팠다.
하늘같이 떠받드는 임금이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었다. 오랑캐라 경멸했던 홍타이지에게 이마를 땅에 대고 항복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머리에 꽉 찬 먹물이 터졌다. 뇌는 까맣게 변하고 정신은 공황상태였다. 무지렁이 백성들은 망연자실했다. 망국의 설움을 안고 북으로 끌려가는 소현세자는 참담했다.
이국땅에서의 볼모생활. 소현세자의 심양 생활은 절망의 연속이었지만 조선반도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았다. 세계의 중심으로 떠받들던 명나라가 멸망하는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고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접했다. 새로운 사상을 접목시킬 조국이 있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허나, 돌아온 그에게 조국은 죽음을 안겨주었다.
흔히들 우리 역사를 가정해보고 싶은 분들이 지목하는 대목이 있다. 고구려가 주축이 되어 삼국을 통일했더라면?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지 않고 요동을 정벌했다면? 광해군이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정조 대왕이 오래 살았더라면? 역사에는 가정이 없고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이러한 아쉬움의 대상이 소현세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