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슬 오브 굿 호프(앞쪽)와 데블스 피크(뒤쪽 봉우리)
김성호
인종차별에 기독교를 악용한 유럽 제국주의이러한 인종차별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바로 네덜란드 칼뱅주의 신교였다. 이스라엘인들이 민족종교인 유대교의 구약성서에 근거해 자신들을 '선민(하느님이 선택한 민족)'으로 생각하듯이, 보어인들은 칼뱅주의를 왜곡해 "하느님의 참된 종은 기독교도인 백인뿐이며, 다른 인종은 백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백인선민' 사상을 만들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정신적 바탕이자 유럽 제국주의의 도덕적 무기였다.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남의 땅을 정복할 때 기독교를 악용했다. 스페인이 남미, 영국이 북미와 호주대륙, 네덜란드가 남아공을 정복할 때 항상 그들의 뒤에서 이론적 뒷받침을 해주었던 것이 기독교였다. 야만적인 이교도들을 기독교로 개종한다는 것이 정복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데이비드 데이는 <정복의 법칙>에서 "유럽 제국주의자의 공통 종교였던 기독교는 남의 영토를 정복하고 소유권을 주장할 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고 말했다. 모세가 아모리족의 시온 왕의 땅을 정복하면서 이교도인 아모리족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멸시켰듯이, 유럽 제국주의는 아프리카를 침략할 때 마치 '모세의 길'처럼 기독교신앙을 도덕적 방패로 삼아 무장했다.
부시 미 행정부 이래 세계에 몰아치고 있는 전쟁의 이면에는 바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선과 악마', '문명과 야만'의 극단적 이분법으로 보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종교적 편향이 깔려 있다. 이슬람세계에 퍼져 있는 미국에 대한 증오심이 친이스라엘의 잘못된 중동정책에서 비롯됨에도 불구하고, 일부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의 테러를 이슬람세계 전체의 문제로 몰아가고 있다. 알카에다의 테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침략이 대표적이다. 네덜란드와 영국이 아프리카를 정복할 때 가졌던 종교적 편견이 미국을 통해 중동지역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케이프타운이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된 이유박물관을 나와서 달링 스트리트를 건너면 높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오래된 성이 보인다. 남아공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희망의 성'이라는 뜻의 '캐슬 오브 굿 호프(Castle of Good Hope)'이다. 네덜란드인들이 처음으로 케이프타운에 정착한 뒤 1666년부터 1967년 사이에 만든 별 모양의 성곽이다.
바람에 나부끼는 성곽 위의 6개 깃발들은 옛날부터 남아공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했던 국기를 오른쪽부터 차례대로 꽂은 것이다. 네덜란드 국기에서부터 옛 영국 국기, 네덜란드, 영국, 백인정권의 남아공, 1994년 민주화 이후의 새로운 남아공 국기 순이다. 이 깃발의 국가와 순서만 보더라도 남아공의 아픈 식민지배와 해방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초기 네덜란드인의 정착과정과 케이프타운의 형성과정을 엿볼 수 있는 성이다. 현재의 남아공은 바로 케이프타운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도시라는 뜻의 '마더 시티'로 불린다. 케이프타운에 유럽의 백인들이 몰려들면서 애초 주인인 아프리카인들과의 싸움이 일어났고,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걸쳐 다민족 다문화의 공존을 모색하는 '민주화된 남아공'의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
1488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던 포르투갈 항해자인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유럽인으로 처음으로 케이프타운 아래 희망봉에 첫 발을 디딘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관리였던 얀 반 리벡(Jan Van Riebeeck)이 1652년 케이프타운에 상륙해 도시를 만들었다. 캐슬 오브 굿 호프의 성곽은 1652년 리벡이 처음 진흙과 나무로 만든 요새를 그 후에 돌과 시멘트벽으로 교체한 것이다. 애초 케이프타운은 유럽과 인도를 오가는 선박들의 가축과 채소, 물 등 식량을 보충하고 쉬어가는 보급 기지이자 정박지로서 개발되었다. 남아공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져온 백인 식민지배가 시작된 것이다.
케이프타운이 희망봉을 제일 먼저 발견한 포르투갈의 소유가 아니라, 뒤늦게 도착한 네덜란드의 소유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 제국주의가 식민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기준은 단순히 먼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정착지를 누가 먼저 건설했느냐 여부였다. 포르투갈은 희망봉에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상륙했었다는 표시는 남겨두었지만 정착지를 건설하지 않고 떠나 버렸기 때문에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뒤이어 네덜란드 백인들의 이주가 줄을 이었는데, 이들 보어인들은 주로 농사와 목축을 했기 때문에 스스로 네덜란드어로 농부라는 뜻인 '보어'라고 불렀다. 이들 보어인과 원주민인 흑인들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이들이 원했던 것이 같았기 때문이다. 땅과 자유였다. 아프리카인 입장에서는 자신이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땅과 자유를 이주민인 보어인이 빼앗아 가려 했기 때문에 이를 지키기 위해 투쟁해야 했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따르지 못하면, 분배를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나는 법이다.
'정착'을 통해 포르투갈과의 소유권 경쟁에서 이긴 네덜란드가 아프리카 원주민을 내쫓는 이유는 '경작'이었다. 원주민들은 땅을 경작하지 않기 때문에 소유권이 없다는 논리였다. 유럽인들은 '농경생활=정착=문명, 유목생활=이동=야만'으로 보았다. 거꾸로 유목생활을 하는 아프리카 원주민 입장에서는 땅은 이용하는 것이지, 경작하는 것이 아니었다. 데이비드 데이는 <정복의 법칙>에서 "원주민은 스스로를 '땅의 주인'이라고 부르고, 네덜란드인을 '땅의 노예'라고 불렀다"고 쓰고 있다. 유목생활을 하는 원주민과 농경생활을 하는 유럽인들의 땅을 바라보는 시각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