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봉림 할머니가 굴 껍질을 까던 중에 환하게 웃고 있다
이정환
움찔해서 더욱 빨라지는 발걸음. 저 앞에서 이장님이 손짓한다. 아마도 요란스런 '마중'에 외지인 방문을 일찌감치 눈치 챈 모양이다. 개와 가축에게 시달리던(?) 차라 더욱 반가운 얼굴, 손영조(54) 이장은 "(박일문 총무에게) 들은 대로지 뭘, 더 말할 게 뭐 있냐"면서 대뜸 손부터 잡아끈다.
마을회관 앞에서 굴 잔치가 한창이다. 헌데 굴이라니, 산골마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메뉴다. 이유를 들어보니 하늘내 들꽃마을다운 잔치다. "거제도에서 '공수'된 굴"이란다.
거제도는 마을 윤동성 사무장 고향. 미대를 졸업하고 도시에서 살다가 귀촌했다. 아내는 학교에 있는 친환경상품 인터넷쇼핑몰 사무실에서 일하고, 가족들은 학교 옛 관사에서 살고 있다.
역시 학교에서 전 사무장으로 일했던 하영택(39)씨는 아예 삶의 터전을 마을로 옮긴 사례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면서도 항상 마음은 귀농에 있었다"는 하씨. 두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도시에서만 생활했던 가족들이 생각보다 빨리 적응해서 다행"이라며 "마을에서 지내면서 공동체적 삶이란 소중한 가치를 확신하게 됐다. 따뜻한 마을 어르신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마을에 생기가 돈다. 즐겁다. 재미있다""뭔 얘길 하고 앉았어, 어여 굴이나 먹어".
하 씨와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여기저기서 '굴 세례'다. 굴 껍질을 까서 내미는 할머니들의 손, 당신은 드시지 않고 손주에게만 먹이며 흐뭇해하는 얼굴과 정말 오랜만에 마주한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구워먹는 굴의 맛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할머니들의 웃음이 돌아온다. 친근함에 '용기'를 얻어 고추장을 담그러 집으로 향하는 범박댁 허성예 할머니(73)의 뒤를 따랐다. "이젠 늙어 자꾸 아퍼 싼 할머니에게 뭘 물을 것이 있냐"는 할머니는 그냥 "좋아, 좋아"만 되풀이한다. "옛날부터 살기 좋았던 마을에 와주는 사람들이 그저 고맙고, 그들과 함께 이것저것 함께 할 수 있어서"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