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실 19세기 러시아 회화는 크게 보아 유럽 회화와 궤를 같이 한다. 19세기 사실주의의 뒤를 이어 20세기에 들어서면 미술의 새로운 언어를 찾아 전방위적 아방가르드 실험에 몰두한다. 그러나 그와 함께 러시아 특유의 정취도 듬뿍 담겨 있다.
이번 전시회는 사실주의 화가들이 빚어낸 다채로운 러시아의 모습을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그중에서도 풍속화는 이번 전시회에서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백미다. 사실주의 화가들의 주력 분야이기도 했다. 그들은 붓으로 당대 사회를 논했다. 사회의 모순, 그 안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백성의 삶.
거기에는 그 유명한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나 먀소도예프 작 <지방자치회의 점심식사>처럼 혁명적이고 사회 고발적 성격의 그림이 있는가 하면 <암산>처럼 웃음을 주는 그림도 있다.
초상화 전시실에서는 차이콥스키, 톨스토이, 고골, 투르게네프를 비롯해 당대 러시아를 주름잡은 문화계 인사들의 얼굴을 통해 그들의 내면세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풍경화들은 어떤가. 흰 눈이 덮인 러시아 겨울의 우아함. 눈이 녹고 봄이 찾아오는 무렵의 환희. 러시아의 자연 풍경이 생소해 보일지라도 화폭에 깃든 우수와 정취는 금세 우리 마음에 젖어든다.
그리고 20세기로 넘어가면 마치 금단의 선을 넘어간 듯 19세기 사실주의와 대비된다. 이제 회화는 본 것을 옮기는 것을 거부하고 정신과 사고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짧은 기간 내에 큐비즘, 수프레머티즘, 레이오니즘, 칸딘스키의 음악적 추상화 등 다양한 유파들이 독특한 회화 언어를 화폭에 실현했다.
냉전 시대에는 감히 가 볼 꿈도 꿀 수 없던 금단의 나라였지만 수교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 러시아는 그렇게 멀기만 한 나라가 아니다. 러시아에 여행 다녀온 사람을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러나 이번 전시회에 걸린 작품들을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러시아에서 보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이라면 단연코 '에르미타쥐 미술관'이다. 루브르, 대영 박물관 등과 함께 세계 4대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명성이 높다. 그런데!
그런데 그 사실을 아시는지? 에르미타쥐에는 러시아 화가가 그린 작품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러시아에 있는 미술관인데 정작 러시아 화가가 그린 걸작품들이 없다니? 말이 되는가? 그런데 그렇다.
왜냐면 러시아 화가들 작품을 따로 모아서 전시하는 미술관이 특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에르미타쥐는 외국 작품들을 모시고 있다. 즉 역할 분담을 확실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웬만큼 러시아 회화에 관심이 있지 않고는 러시아 여행을 가서 본토 그림은 구경도 못 하고 오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니 이번 전시회가 특별할 수밖에. 암스테르담에 가는 한국 여행객치고 고흐 미술관을 찾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러시아에 가는 여행객 중에는 '러시아 박물관'을 찾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이번 겨울 '러시아 박물관'이 모스크바의 보배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공동으로 힘을 합쳐 우리에게 종합세트 선물을 보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