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데이비드 하비
매일신문
왜냐하면 지난 20년간을 모두 이러한 단순구조로 결론짓고 만다면 이 시기에 새롭게 등장하여 현재까지 가장 거대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정치세력, 즉 오늘날 한국 정치사회 전반에 걸쳐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소위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은 도대체 실체없는 유령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아니다. 정치사적으로 '87체제'는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섬으로서 사실상 완결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87체제의 가장 큰 과제는 바로 그 이전의 군사정부를 종식시켜 문민정부로 나아가는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현재 나타나고 있는 대부분의 모순들은 그것이 '87체제의 연장'이 불러온 문제라기 보다는 엄밀히 말해 이 시기에 '민주'의 탈을 쓰고 '신자유주의'로 철저하게 무장된 정치세력들의 출현이 야기시킨 필연적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다른말로 '97체제' 말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87~97년 사이 10년은 소위 3저현상(저유가,저물가,저달러화)에 힘입어 한국경제가 거침없는 고공행진을 이어갔던 시기이다. 더불어 이 시기는 한국경제에서 역대 어느 정권들 보다도 중산층이 가장 투터워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 였을까.
가장 큰 문제는 당시 정권을 책임졌던 그 누구도 이러한 호기가 그동안 축적되어온 한국경제의 내실에 의해 나타난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라 단지 일시적이고 매우 불안정한 외부적 요인(직접적으로 만성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레이건 정부의 '레이거믹스'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제대로 통찰해 내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해서 정통성 없던 정부들은 더욱 향락산업을 부추기고 소비를 권장하여 내수경기를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모든 정책들을 집중해 갔으며-소위 Sex, Screen, Sport의 3S정책- 여기에 따라 호재를 맞은 기업들의 방만한 경영과 무분별한 문어발식 확장은 결국 국가 전체를 한판의 거대한 투기장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그러니 박정희 시대 이후로 지속되어온 일방향의 개발독재로 초래되었던 모든 부정적 요소들, 즉 산업구조의 재편 문제, 노동문제, 재벌특혜 문제 등등 한국경제가 당시 반드시 조정하고 갔어야할 본질적 문제들은 전부 간과되고 단지 언제 주저앉을지 모르는 사상누각 위에서 나라 전체가 모두 미쳐 한판 향락의 축제를 벌였던 것이다. IMF 사태를 맞고나서 외신들이 일제히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비아냥만큼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집어낸 말이 또 있을까.
그러나 이것은 단지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 97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며 본격적으로 도입되었고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비한다면 말이다.
혹자는 당시 부도난 국가위에서 김대중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불가피한 측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김대중 정부가 행한 외국자본에 대한 국내기업의 무분별한 헐값매각과 카드채 남발로 이상내수경기진작 이라는 두가지 씻을 수 없는 과오까지도 모두 이해받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 관대하다고 생각한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한 가정에 부도가 났는데 (시간이 좀더 걸리더라도) 자생과 재기의 노력을 기울이기 보다는 집과 세간살이를 전부 헐값에 내다팔고 게다가 카드로 빚까지 내서 잔치를 벌인 꼴이다. 물론 그러한 이유로 가장들은 구조조정이라는 미명하에 강제적 실업 내지는 헐값에 외국자본의 노예로 전락하는 또다른 고통과 맞딱드려야 했는데 이를 어떻게 진정한 IMF의 극복이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그랬다. 국내 알짜기업들을 외국자본에 헐값에 넘기는 것을, 그리고 단지 기업이름을 미국식으로 갈아치우는 것을 곧 '세계화'로 착각한 이른바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위대한? 탄생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노무현 정부의 소위 노동유연화 정책에 따른 비정규직법 제정은 자본과 노동의 수평적 관계를 국가가 나서서 수직적이며 적대적 관계로 급격히 변모시킨 일련의 폭거였다. 또한 한미FTA는 한 국가로서 최소한의 주권과 정체성 마저도 포기하겠다는 항복문서이자 대재앙의 약속어음이며 가히 신자유주의의 완결판에 다름 아니다.
모두에게 묻고싶다. 지금 당시와 비교해 외환보유고 몇십배 쌓아놓으니 정말 살기 좋아 졌는가라고..
이란성 쌍둥이, 신자유주의 정치세력 그렇다면 지난 10년, 다분히 자의적으로 '민주', '개혁', '평화'의 구호를 독식해온 이 정치세력의 정확한 정체성은 무엇일까. 이들은 정말 항간에 알려진 대로 '진보정치세력'인 것일까. 아니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시의성'이다. 즉 현재의 기준에서 볼때 시대정신에 맞게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가 아니면 현재의 고수나 과거로의 회귀를 지향하고 있느냐의 차이야 말로 가장 쉽게 진보와 보수를 변별해 볼 수 있는 한가지 명확한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현재의 시대정신은 과연 무엇일까. 반공인가? 아니다. 민주인가? 이 역시 아니다. 나는 지난 10년-그것을 사전에 우리 모두가 눈치챘던 아니던 간에- 한국사회의 전 부문에 걸쳐 가장 지배적으로 군림해온 이데올로기는 바로 '신자유주의'라고 단정하고 싶다. 왜냐하면 결과론적으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주요 사회모순들의 원인을 역추적해 보면 바로 여기서 파생된 모순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실업, 저성장, 비정규직, 사회양극화, 저출산, 고령화, 유전무죄, 관료주의, 모피아 등등 말이다.
고로 현재의 시대정신은 누가 뭐라해도 단연 '반신자유주의'다. 하물며 이러한 신자유주의를 이땅에 무분별하게 도입하고 이를 고수하며 그것도 모자라 한미FTA 등으로 더욱 확대해 가려는 세력이 어찌 '진보'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신자유주의를 지향하며 현재를 고수하려는 이들 세력들을 통틀어 감히 '신보수'라 명명하고 싶다.(솔직히 또다른 '신보수'로 불리워지고 있는 뉴라이트와 이들의 차이점을 나는 구분해 내지 못하겠다.)
과거의 구보수가 정치적으로 쿠데타에 기반한 군사세력이자 경제적으로 개발독재, 이념적으로 반공주의로 무장된 세력이라면 신보수는 정치적으로 민주화, 경제적으로는 자유시장주의에 입각한 신자유주의, 이념적으로는 '리버럴리즘'에 기반한 실용주의의 특징을 보인다.
한국정치를 크게 양대산맥으로 이분해온 한나라당과 대통합신당이 그 태생적 차이를 두고 마치 전혀 다른 세력인양 서로 과장되게 대립각을 세워오고 있지만 사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단지 정책적 유사성 뿐만 아니라 (극소수를 제외하고) 이 두 세력의 공통점은 놀랍도록 유사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보자. 김영삼의 3당합당 이후 한나라당의 주류는 지속적인 피가름을 통해 사실상 많은 변화를 보여왔기에 현시점에서 전적으로 군사독재세력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만약 '순혈주의'로 바라보자면 자칭 '민주개혁평화세력' 역시 김대중의 'DJP 연합' 이후 '군사독재세력'이란 오명을 함께 공유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공정한 잣대와 엄격한 눈금없는 정치적 편가름은 다분히 정파적 입장에 치우친 허상일 뿐이다.
역사적으로도 김영삼과 김대중은 원래 '민주화'라는 한 태내에서 배태된 이란성 쌍둥이다. 그렇기에 이 두 세력이 그동안 전면에 내세워온 산업화니 민주화니 같은 다분히 구호적 레토릭을 제외하고 보면 이들이 가진 사상과 이념의 거처, 걸어온 길(정책과 노선)은 놀랍도록 유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민주화 세력중 정치적으로 '개혁', '개방(세계화)'을 가장 먼저 내세웠던 이가 바로 김영삼이며 남북정상회담 역시 김영삼이 이를 먼저 추진했었다는 사실이 이를 강력히 뒷바침하지만 지난 10년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진 정권에 의해 이러한 흔적은 의도적으로 회피되었다. 하지만 반대급부였는지 이들은 공공연히 한나라당의 부활을 도우며 산업화세력에서 신자유주의 세력으로 견인해내기까지 하며 변함없이 그 견고한 파트너쉽을 형성해 왔다.
혹 '개발', '개방', '성장', '선진화'라는 이들의 공통분모가 상호 별 거부감없이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고 기득권을 확장해 가는데 보다 유리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참여정부 들어 유시민이 한나라당과는 함께 할 수 있어도 민노당과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다던 말은 바로 이런 본질을 내포한 심각한 자기고백처럼 느껴진다.
사람 마음은 속일수 있어도 씨도둑은 못속이는 법이다. 짧게는 지난 5년간 한국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들의 주요 정책들을 살펴보라. 겉으로는 그렇게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듯 보였지만 사실 그렇게 입버릇 처럼 내세우던 자유시장주의라는 미명하에 비정규직악법, 이라크 파병동의안, 대재벌정책, 국가보안법, 사학법, 한미FTA 등등 한 정치세력의 정체성과 직결된 법안이나 정책들은 번번히 이 두 세력간의 긴밀한 공조나 묵시적 합의하에 통과되거나 무산되어왔다. 결코 과장이 아니라 특히 두 당의 정책을 직접 담당해온 담당자들은 아마도 이 유사성에 몇번인가 스스로도 놀라자빠지곤 했을 것이다.
그러니 제발 이제 좀 솔직해지자. 이미 낡아빠진 '민주-반민주'로 불필요한 반목과 대립을 반복하면서 서로의 밥그릇만큼은 알뜰히 챙겨줘왔던 파렴치한 정치쇼를 도대체 언제까지 지속할 셈인가. 정치는 실종시키고 민중의 삶은 도태시키며 오로지 항구적으로 자신들의 배만 불리겠다는 이러한 반역사, 반민중적 작태를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할 셈인가 말이다.
대선정국에 실종된 미래, 한미F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