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카사르 무데하르 양식을 보여주는 정원 장식 일부무데하르는 특징적인 양식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정련된 양식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이은비
브레인이 빠져나간 세비야는 결국 공황 상태에 빠져...문화와 문화가 만나고 교류할 때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는 그라나다의 알함브라를 통해서 충분히 입증이 가능합니다. 완벽한 자연스러움과 통일성이 느껴지는 알함브라에 비해 알카사르는 정원과 궁전이 따로 노는 인상을 줍니다. 이처럼 그라나다가 떠오르는 태양 같은 스페인의 영광을 보여준다면, 세비야의 알카사르는 저물어가는 스페인의 몰락 이유를 보여줍니다.
정원을 빠져나가는 동안, 영국인 가이드가 영국 관광객들을 상대로 “기독교는 이슬람에 빚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 알함브라와 이곳 알카사르를 보며 마땅히 부끄러운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라는 말을 목청껏 떠들어대는 것이 들립니다. 하지만 여전히, 왕궁 복도에 걸린 태피스트리가 보여주는 기묘한 부조화를 생득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서양인은 근본적으로 어떤 점을 부끄러워해야 할지 모르리란 생각이 들어 기분이 까마득해졌습니다.
알카사르를 나온 뒤 세비야 성당을 둘러보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 미겔씨에게 마지막 인사를 던지고 나오니 드디어 마드리드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절박하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전날 세비야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마드리드 행 버스표를 구입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곳의 복잡한 교통사정 때문입니다. 세비야는 그라나다, 론다, 말라가, 코르도바 행 버스가 출발하는 남부버스터미널과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 북중부행 버스터미널이 각각 다른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해당 터미널이 아니면 상대쪽 버스시간표조차 구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각 버스터미널 사이의 거리는 대단히 멉니다.
하지만 제가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안달루시아의 주도(主都)답게 사통팔달한 세비야의 교통루트였습니다. 세비야에는 국내선 공항도 있을 뿐더러 스페인의 자랑거리인 국영철도 아베(Ave)도 뚫려 있습니다. 날개를 모티브로 디자인된 아베철도의 상징대로, 열차를 타면 세비야에서 마드리드까지 2시간 30분만에 주파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자신만만했습니다. 훗, 세 시에 여유롭게 출발하면 마드리드에서 저녁 먹겠지.
주도답게 사통팔달한 교통, 그러나 통합교통체계 부재여행자라면 반드시 교통예약이 필수허나, 세비야 시내 투어리스트 인포메이션 두 곳이 모두 열차 시각표를 갖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교통시스템에 대한 통합검색 체제가 없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오가 지나자 돌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엄청난 돌풍이 도시 전체를 덮쳤습니다.
안달루시아를 떠나기 전에 이 유명한 편서풍의 위력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으니, 이것도 하나의 경험이라고 할 만한지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능히 강에 범선을 띄워 아메리카 대륙까지 보내버리고도 남을 편서풍과 싸워가며 철도역으로 갔습니다.
벌써 3시가 훌쩍 넘은 시간, 철도역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바글거립니다. 이른 시각의 열차는 모두 매진이었고, 3등 열차는 내일 것까지 만석이었습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오늘이 금요일이었지.
할 수 없이 역을 나와 북부 버스터미널까지 택시를 타고 달렸습니다. 택시를 타자마자 계란만한 빗방울이 물폭탄처럼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아, 정말 편서풍 지대의 날씨는 변화무쌍하기 그지없습니다.
낙천적인 안달루시안 택시기사 아저씨는 그 와중에도 “이건 쥬비아야. 더위를 식혀주는 고마운 선물이지”라고 찬탄합니다. 그 어감이 마음에 들어 몇 번 입으로 되뇌어 봤습니다. 과연, 그렇게 예쁜 이름이라면 좀 갑작스럽고 과격한 비여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래 비(雨)는 스페인어로 ‘유비아’. 하지만 안달루시아에서는 U를 J로 발음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유비아보다 ‘쥬비아’라는 발음이 더 예쁘게 느껴지는 이유는 역시 제가 안달루시아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