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의 송경령고거(故居)에 있는 손문 부부의 사진.
김종성
첫째, 중국인들이 손문을 국부로 숭상하는 것은 그가 봉건제도를 혁파했기 때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전문에서는 “이십세기에 중국에서는 하늘을 뒤엎고 땅을 뒤집는 위대한 역사적 변혁이 발생했다”면서 “1911년에 손중산(손문, 인용자 주) 선생이 영도하는 신해혁명은 봉건전제를 폐지하고 중화민국을 창립하였다”라고 하였다.
중국인들이 헌법에 실명까지 거론하면서 손문을 칭송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봉건전제제도를 혁파한 신해혁명의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족들에게는 손문의 혁명을 계기로 권력이 만주족에서 한족으로 옮겨졌다는 점도 중요할 것이다.
물론 중화민국 창립에 참여한 것도 그의 주요 업적이기는 하지만, 그 점은 오늘날의 중국인들에게 ‘손문을 존경할 만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륙에서는 중화민국 그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대만에서는 기존의 중화민국 대신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중화민국이라는 나라가 현대 중국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중국인들이 손문을 국부로 숭상하는 것은 그가 좌우의 대립을 통합할 만한 역량을 보유한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손문이 대륙과 대만에서 모두, 그리고 공산당과 국민당에게서 모두 존경을 받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손문 생전에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갈등이 잠복해 있다가, 손문이 죽은 뒤인 1927년에 장개석(장제스)이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탄압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손문은 으르렁대는 두 아들의 싸움을 억제할 만한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손문에게는 좌우의 대립을 억제할 만한 ‘아버지’로서의 카리스마가 있었던 것이다.
손문이 중국인들로부터 국부로 존경을 받는 것은 위와 같이 봉건전제제도를 타파한 ‘혁명가’인 동시에 좌우의 대립을 억제하고 통합을 가능케 한 ‘아버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공산당 중국이나 국민당 대만의 어느 한 쪽에 국한되지 않는, 초월적인 통합의 지도자였다.
그에 비해 이승만은 어떠한가? 자세히 언급할 필요도 없이, 이승만은 한국에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 준 인물이 아닌 데다가 통합은커녕 남북분단에 중대한 책임을 진 사람이기도 하다.
손문은 국·공 분열 이전의 중화민국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했지만, 이승만은 한민족이 분열된 상태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에 올랐다.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이라는 점에서는 손문을 닮았을지 모르지만, 전체가 아닌 부분의 대통령에 불과했다는 점에서는 손문과는 분명히 다른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