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과 미륵보살반가석상(보물 제367호와 보물 제367호).
안병기
이 세 개의 비상은 비석 형태에 불상을 조각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은 형식이다. 석질은 모두 연질의 납석 종류이며 적갈색을 띠고 있다. 백제가 멸망한 후, 한때의 왕도였던 공주의 인근에 있는 유물을 이 절에 봉안한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먼저 국보 제106호인 삼존석상을 보면 4각의 긴 돌 각 면에 불상과 글씨를 조각한 비상 형태이다. 정면엔 아미타삼존상을 조각하였다. 가장자리를 따라 테두리를 새기고, 그 안쪽을 한 단 낮게하고 나서 새긴 것이다.
커다란 연꽃 위의 사각형 대좌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얼굴 부분이 갸름하다. 앉은 자세가 매우 안정돼 있다. 또 양쪽 측면에는 비파, 생황, 긴 피리, 장구, 금, 젓대, 배소 등을 연주하는 8명의 천인들이 둥둥 떠 있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비상에는 "전(全)씨들이 마음을 합쳐 아미타불과 관세음, 대세지보살상을 삼가 석불로 새긴다. 계유년 4월15일…중략…목(木) 아무개 대사 등 50여 선지식이 함께 국왕, 대신, 7세(七世 ) 부모의 영혼을 위해 절을 짓고 이 석상을 만들었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계유년은 문무왕 13년(673)이다. 이 비상의 내용에 입각해 지금도 이곳에선 해마다 4월 15일이면 괘불을 걸고 백제대제를 거행한다.
보물 제367호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己丑銘阿彌陀如來諸佛菩薩石像)은 배 모양의 돌 앞면에는 큰 연꽃 위에 앉은 본존인 아미타불을 새겼다. 엄격한 좌우대칭 수법에 따라 좌우에는 서 있는 자세의 불상들이 새겨져 있다. 아미타불의 머리 위에도 5구의 작은 부처를 새겼는데 그 위에 다시 7구의 작은 부처를 더 새겨넣었다.
삼국시대 불상 요소와 새로 들어온 당나라 요소가 혼합된 통일신라 초기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기축년이란 신라 신문왕 9년(689)일 것으로 생각된다.
보물 제368호 미륵보살반가석상은 곱돌로 만든 석상이다. 정면에는 왼발을 내리고 오른발을 왼쪽 다리에 올린 채 오른손을 뺨에 대고 생각하는 자세를 취한 반가상이 새겨져 있다. 이 반가상은 머리에 화려한 관(冠)을 쓰고 있으며 목걸이와 구슬장식도 갖추고 있다. 반가상 양쪽에는 두 손에 보주를 들고 정면을 향하고 있는 보살 입상이 새겨져 있다. 아마도 반가상을 본존으로 삼아서 3존 형식을 취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는 보탑을 크게 새겼다. 이 보탑으로 보아서 정면의 반가상이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크게 발달한 반가사유상 양식의 아름다운 비상이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과 같은 시기인 서기 673년에 조성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연기군 일대에서 백제가 멸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조성된 이 석상들은 매우 아름답다. 당시 백제의 석조미술 수준이 얼마나 뛰어난 것이었는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석수는 아름다운 유물들을 탑 꼭대기에 숨길 수밖에 없었을까. 자신의 은밀한 비원을 숨기려고? 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신라군이나 당나라 군사에게 강탈당할까봐?
약간 조잡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유물들이 얼마나 화려한 것인지를 추측하는 데는 별 부족함이 없다.
모사품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다. 기왕 모사품을 만들어 놓으려거든 조금 더 정밀하고 세심하게 만들어 놓았더라면 좋았을 걸. 요즘엔 진짜 뺨치는 짝퉁이 얼마나 많은가. 차라리 실물을 크게 확대한 사진을 걸어두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