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온의 묘.경기도 수원 이의동에 있다.
이정근
심온에게 압슬형이 가해졌다. 압슬형에 이길 장사 없다. 영의정의 산 같은 위엄은 산산이 부서졌다. 자존심도 철저하게 짓밟혔고 체신도 무너졌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 심온이 순순히 모범 답안을 내놓기 시작했다.
“강상인이 아뢴 바와 모두 같습니다. 신은 무인(武人)인 까닭으로 병권을 홀로 잡아보자는 것뿐이고 함께 모의한 자는 강상인 등 여러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막을 내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신문도 고통도 마감하는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불과 4개월 전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할 때, 아들의 머리에 원유관을 씌워주며 문무백관들에게 천명한 말이 있다.
“주상이 아직 장년이 되기 전에는 군사(軍事)는 내가 친히 청단할 것이고 국가에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정부·육조로 하여금 함께 그 가부를 의논하게 할 것이며 나도 함께 의논하리라. 병조 당상은 나에게 시종하고 대인들은 주상전에 시종하라.”태종의 전위교서에 어긋나는 자백을 받아냈으니 더 이상 신문할 필요가 없었다. 의금부에서 계본을 갖추어 신문 결과를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태종은 안수산을 예천에 유배 보내고 심온에게 자진하라 명했다. 왕비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참형이나 거열형을 행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예우해 준다는 것이다.
이튿날 진무 이양에게 심온을 수원으로 압송해 자진(自盡)하게 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말이 자진이지 사사(賜死)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하여 44년 심온의 생애가 막을 내렸다. 심온에게 체포령이 떨어진 것이 11월 25일, 목숨을 끊은 것이 12월 25일. 딱 한 달 간 벌어진 일이었다.
250여 년이 흐른 현종 때,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집어던진 이익은 <성호사설> '인사문'에 이렇게 기록했다.
‘민씨와 심씨 두 집안이 태종에게 흉화(凶禍)를 당했으나 대개 먼 장래를 생각함이 매우 깊었던 것이다.’589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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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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