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생기니 잠이 쏟아집니다

집에 얽힌 사연... 그 때를 회상하면 행복합니다

등록 2007.11.21 13:21수정 2007.11.2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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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 살에 결혼하고 올해 나이 쉰이니 집에 얽힌 사연은 23년의 연륜을 가졌군요. 며칠 후면 우리 부부는 아주 특별한 집으로 이사 갑니다. 15평 월세 아파트지요. 그곳에서 우리 부부만의 새 생활이 시작됩니다.

 

이 특별한 집은 아마 열세 번째 집이지 싶습니다. 그동안 살았던 집들을 기억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별로 그럴 생각이 없네요. 지난 시간이 고단해서일까요?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우리의 신혼도 참 별났습니다. 신접살림은 월미도에서 시작했어요. 제 직장이 월미도 앞바다에 떠있는 영종도에 있었습니다. 초임 발령이라 남들이 꺼리는 곳으로 발령이 난 것 같습니다. 남편 직장은 광화문이고 해서 월미도에서 350만원짜리 전세를 살았죠. 단독주택을 내 집처럼 쓸 수 있어서 일요일이면 마당 수돗가에서 남편이랑 빨래도 하고 재밌었습니다.

 

2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부천으로 올라와 도시 생활을 하면서 삶이 정신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신설 학교의 생활은 두서가 없었고 남편과는 서로 자기를 앞세워 티격태격했으며 도시의 환경은 황량했습니다. 첫 아이를 낳은 후 아이를 서울 친정으로 주말마다 데려가고 데려오고, 아이가 자라 놀이방에 가게 될 때까지 집이 몇 번 바뀌었습니다.

 

32평 아파트에서 주인과 한 화장실을 쓰면서 살기도 했고 남편 후배가 살던 연립에서도 살았으며, 방 두 칸 전세에서 시이모님(딸을 1년 정도 키워주셨습니다)과 살다가 남편의 투자 실패로 방 한 칸이 사라져 이모님과 딸, 살림살이가 이리저리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주인집 학생이 야금야금 장롱 속의 패물이며 살림살이를 내다 파는 집에서도 살았습니다.

 

하지만 집 없는 설움 같은 건 없었습니다. 오히려 집 구하러 다니는 일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각양각색의 집 속에서 살고 있었고 지금 생각해보니 모두들 참 편하게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안방에 이불이 널브러져 있고 베란다에 살림이 뒤죽박죽 쌓여 있고 부엌엔 설거지거리가 수북한 집이 많았으니까요. 모르는 사람들의 살림집을 예고 없이 찾아가 부담없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거. 전 그 재미를 한동안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 후배가 결혼하게 되었는 데 마침 우리가 이사하게 되어 18평 아파트에 두 세대가 함께 살았던 적도 있습니다. 그때를 회상하면 행복합니다. 후배는 선배를 너무 사랑해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그 안사람은 호탕한 성격에 음식 솜씨가 좋아 언제나 하하 호호 하며 살았습니다.

 

그 당시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이 집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일산이 어떻고 분당이 어떻고 청약 통장이 어떻다는 얘기.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우리 부부는 살고 있는 집이 내 집이라는 생각이 같았습니다. 그래서 쓸고 닦으며 내 집처럼 살았습니다.

 

아이가 크는 재미, 직장에서 느끼는 성취감, 후배 부부와의 재미난 생활 말고 더 필요한 것이 없었습니다. 친정어머니가 딱지라는 걸 사셔서 광명에 아파트 하나를 장만하셨다고 우리보고 가서 살라고 하셨지만 직장 다니기 불편하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할 정도였습니다.

 

둘째가 태어나고 공립학교 순환근무를 위해 거처를 안산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10여년 전 안산은 부천에 비하면 외국 같은 생활환경이었습니다. 게다가 전세값도 싸서 우리는 산밑에 32평 빌라를 얻었고 집이 너무 넓어 어느 구석에서 잠을 자야 할까 고민할 정도였습니다. 넓고 쾌적한 환경에서 주인까지 잘 만나 6년을 내 집처럼 살았는데 소리없이 이상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집을 나서고 버스를 타고 종종걸음을 치는 일에 회의가 들었습니다. 맞벌이 10년이 넘도록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축적된 교육 노하우도 없고 아이들과 부비적거릴 시간도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러던 중 가슴에 양성 종양을 수술하고 만 일 년 만에 난소 낭종을 제거했습니다. 낭종은 지름이 9센티나 되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3년을 망설이던 사표를 썼습니다. 그리고 돈 벌 궁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친정어머니가 하시던 대로 집을 샀다가 파는 일을 하기로 했죠.

 

남편 직장이 서울인데 굳이 안산에 있을 이유가 없어 서울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 해가 1997년, IMF가 시작되던 해였습니다. 전세금에 퇴직금과 친정어머니가 보태주신 돈을 합치면 작은 아파트를 하나 살 수 있었죠. 저는 고심 끝에 전세를 얻고 같은 단지 안의 작은 아파트를 전세 끼고 하나 샀습니다.

 

그 아파트는 2년 만에 재개발 아파트에 투자되었고 다시 2년 만에 재개발 아파트가 부도날 즈음 나는 유방암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원금 회수를 위해 부동산을 들락거렸습니다.

 

큰아이가 외고에 입학했고 교육비가 만만찮을 때 남편은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며 씀씀이가 커져가니 외벌이에 빚이 늘어갔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학원에 나가 다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과 부동산으로 빨리 돈을 버는 일이었습니다. 참 어리석은 생각이었죠.

 

재개발 투자 실패는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이 와중에 온 식구가 남편 직장 일로 미국에 일 년간 머물게 되었는데 LA 공항에 첫발을 디디며 내가 느낀 건 안도감이었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평온했습니다. 처음에는 탁 트인 시야와 야트막한 집들이 주는 편안함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치열한 생존 경쟁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안도감이었습니다.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생각. 하지만 다시 돌아와야 했고 돌아오면 안식할 집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미국에서 50회 생일을 맞았고 50이 되어서까지 전세살이를 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궁여지책으로 친정살이를 택했습니다. 남편의 묵묵부답으로 석 달은 혼자 애를 태워야했지요. 귀국 후 6개월 만에 유방암은 폐에서 재발하였고 1년 정도 혼자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수도원에 몇 달, 강원도 산 속에 몇 달, 친구 별장에서 보름….

 

친정어머니는 내가 공기 좋은 곳에 머물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내가 집에 오는 것을 불편해 하셨습니다. 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고 재발 후에 서둘러 분양받은 아파트 중도금이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라 자금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내 건강이 점점 나빠지자 남편은 빚이라도 내려고 했죠. 한사코 말렸습니다. 마음이 불편하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숨이 쉬어지지 않아 공포 속에 혼자 어쩔 줄을 모르다가 더운물로 샤워를 하게 되었는 데 번개처럼 '집'이 스쳤습니다. 집이다. 집 때문에 내가 이 지경이 됐다. 쉬고 막힌 목소리로 친정어머니께 악을 썼습니다.

 

"여기가 내 집이야. 왜 자꾸 나가라고 그래. 어디로 가란 말이야? 나도 나가고 싶어. 하지만 갈 곳이 없잖아. 나 숨도 못 쉬고 죽을 거 같아."

 

새 아파트는 내년 10월 입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11월 25일 산 밑 조그만 월셋집으로 이사를 합니다. 부부 만의 새 삶터로 가는 날 이삿짐 차는 오지 않습니다. 가볍게 살기로 했습니다.

 

자꾸 잠이 옵니다. 맘이 편안한가 봅니다. 집은 사람을 살리는 곳이었습니다.

2007.11.21 13:21ⓒ 2007 OhmyNews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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