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달러 패권'과 전쟁에 중독된 미국

'이라크-베네주엘라-이란'을 관통하는 '불편한 진실'

등록 2007.11.19 14:14수정 2007.11.19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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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5월 1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 선상에서 이라크 전쟁의 임무 완료를 선언한 뒤 병사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2003년 5월 1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 선상에서 이라크 전쟁의 임무 완료를 선언한 뒤 병사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미 국방부

미국이 2003년 3월 하순 이라크 침공을 강행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후세인 정권과 알-카에다와의 연계설 및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설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명분은 모두 거짓이었거나 조작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자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은행(FRB) 전 의장은 "침공의 이유는 석유에 있다"는 '상식'을 말해 백악관을 발끈하게 만들기도 했다.

2002년 4월 중순 베네주엘라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 세력은 민주선거에 의해 선출된 유고 차베스 대통령을 감금하고 의회와 대법원을 해산시켰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쿠데타로 집권한 페드로 카르모나 정권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쿠데타는 '2일 천하'로 끝났다. 차베스를 지지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군부와 경찰의 상당수가 민중봉기 진압을 거부하면서 차베스가 다시 권좌에 앉게 된 것이다. 쿠데타 발생 직후 <뉴욕타임즈>와 영국의 <가디언> 등 많은 언론은 중앙정보국(CIA) 등 미국 정보기관이 쿠데타를 지원했다고 보도했다.

최근 미국의 '이란 공격 준비설'이 무성하게 나오고 있다.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이라크 저항세력을 도와 미군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전쟁 머신으로서의 미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들 세 가지 사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최강의 군사력과 함께 미국 패권을 상징하는 '달러'다.

"석유값, 유로로 지불해달라"고 말한 이후

2000년 11월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은 석유 거래 화폐를 달러에서 유로로 대체하겠다고 발표했다. 안 그래도 달러화 약세로 초조해하던 미국에게는 날벼락과 같은 소식이었다. 2001년 1월 말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이 문제는 당연히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고 첫 내각 회의가 열렸을 때, 사담 후세인의 제거 필요성을 강력하게 들고 나온 사람이 있다. 바로 재무부 장관인 폴 오닐이었다. 후세인 정권이 '달러 패권'을 흔들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후세인을 제거한 이후 이라크의 모든 석유 수출은 달러로 거래되고 있다.

2001년 주러시아 베네주엘라 대사는 자국의 모든 석유 판매는 앞으로 유로로 거래될 것이라고 말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것"일까? 그로부터 1년 후, 베네주엘라에서는 미국의 지원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쿠데타가 발생했다. 그러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고, 차베스 대통령은 '반미'를 상징하는 인물로 각인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석유 거래 통화로 유로를 선호하고 있다.


2006년 3월, 세계 4위의 석유 생산국이자 부시 행정부가 "악의 축"으로 지목한 이란이 또 한차례 '달러 패권주의'를 뒤흔드는 발표를 한다. 후세인과 차베스에 이어 석유 수출 대금을 유로로 결재해달라고 수입 업체에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차베스에 이어 '반미 선봉'에 나선 마흐무드네자이드 이란 대통령은 엄포로 끝내지 않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로 인해 2006년 말에는 석유 결재 통화로 유로가 차지하는 비중이 57%에 달하게 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부시 행정부가 이란에 대한 강경책을 높이고, 미국 정부 안팎에서 이란 공격설이 등장하는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반미·좌파의 주장이 아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위와 같은 설명은 마치 '반미·좌파'가 퍼뜨리는 음모론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을 가장 열심히 펼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미국 하원의 공화당 중진 의원인 론 폴(Ron Paul)이다. 폴 의원은 2006년 2월 15일 미 하원 연설에서 "달러 패권의 몰락"이라는 주제로 위와 같은 내용의 연설을 한 것이다.

폴 의원은 작은 정부와 감세, 그리고 자유시장을 신봉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공화당스럽다. 그런데 그는 애국법과 이라크 전쟁, 그리고 인터넷 규제 법안에 반대표를 던져 부시스럽지 못한 인물이기도 하다. 미국 헌법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미국 정치인 가운데 지독한 원칙주의자로 분류되는 그를 두고 전 재무부 장관인 윌리엄 사이먼은 "미국 의사당의 535명의 깡패(gang) 가운데 유일한 예외"라고 말하기도 했다. 폴 의원은 2008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쟁에 뛰어들었으나, 전체 여론조사는 5% 정도, 공화당원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2% 가량의 지지도에 머물고 있다.

폴 의원의 메시지는 간명하면서도 중대하다. 미국인들이 저축은 하지 않고 과도한 소비주의에 중독되어 있는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달러화의 약세는 피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미국은 '달러 패권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그 도전 세력에게 군사력을 사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달러, 제국의 상징에서 쇠퇴의 상징으로

1944년 세계의 기축 통화를 영국의 파운드에서 미국의 달러로 대체하기로 한 브레튼-우즈(Bretton Woods) 체제 등장 이후 '달러'는 미국 패권의 상징이었다. 달러는 파운드를 대체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영원한 기축통화로 간주되었던 금과 '동일물'이기도 했다. 미국은 순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시켰다. 이에 따라 '금=달러', '달러=세계 기축통화'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달러 발행을 남발해 물가가 폭등하자, '달러 패권'은 위기에 직면했다.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서 미국이 순금 1온스를 35달러를 받고 내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은 금 태환 정지를 선언했고, 브레튼-우즈 체제는 붕괴되었다.

위기를 맞은 '달러 패권'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된다. 석유로 금을 대체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과 석유생산기구(OPEC)는 협정을 맺어 석유 거래 통화를 달러로 통일시키는 대신, 이들 국가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위기가 있었지만, '달러'로 상징되는 미국의 패권주의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은 또 다시 30여년 전에 직면했던 '달러 패권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위기의 원인은 다른 데 있다. 예전의 위기가 달러화 남발로 엄청난 인플레이션에서 비롯되었다면, 이번에는 엄청난 정부 부채와 가계 부채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는 30여년전의 위기 처방책을 쓰지 못하고 있다. 닉슨 행정부는 이자율을 크게 높여 달러 가치를 억지로 붙잡아 두었었다. 그러나 오늘날 예전처럼 또 다시 이자율을 크게 높이면 미국 정부와 가계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고, 수출과 소비 진작에도 치명타를 안겨주게 된다.

달러 약세가 지속되자, 막대한 달러를 사들이고 저축해 달러 가치를 지탱시켰던 투자자들이 달러 보유의 매력을 잃어 가고 있다. 달러화 가치가 떨어진 데다가, 서브프라임 사태가 보여주듯 미국의 금융시스템의 문제점이 불거져 신뢰도도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미국 패권의 연착륙을 고민할 때

최근 미국 언론은 '달러 약세'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미국 패권의 쇠퇴를 상징한다고 강조한다. 경제전문지인 블룸버그 통신은 "'약한 달러' 현상이 세계의 정치ㆍ경제적 권력구도가 재조정에 들어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분석기사를 14일 내보냈다.

달러화 가치의 하락은 중국ㆍ인도의 부상과 유로화 가치 상승, 미국의 기록적인 부채와 무역적자, 런던의 세계 경제 중심지 부상 시도, 미 부동산 경기악화 등 다양한 요인이 맞물려 달러화가 점점 그 힘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러 국가들은 '약한 달러'에 대한 대비책 마련에 들어갔다. 쿠웨이트는 달러 고정환율제를 포기했으며, 한국은행은 국내 조선업체들에게 송장을 원화로 발행하라고 촉구했다. 중국 정부는 외환 보유를 다변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세계 각국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도 크게 감소하고 있다. 1999년 전세계 외환보유고의 71%를 차지했던 달러의 비중이 2007년 2사분기에는 64.8%로 줄어들었다. 반면 1999년 도입된 유로화는 현재 전세계 외환보유고의 25.6%를 차지하고 있다. 더구나 세계 최대 증권사 메릴린치는 향후 5년간 최대 1조2천억 달러가 다른 화폐로 전환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처럼 2차 대전 이후 세계 기축 통화 역할을 해온 달러 약세가 지속되자,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미국 외교협회(CFR)의 경제전문가인 세바스챤 말러비는 11월 12일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세계는 지금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고 말한다.

약해지고 있는 달러를 보유하는 것이 득보다 실이 더 커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달러화 가치 하락을 계속 방치할 경우 자신들의 수출 경쟁력이 크게 떨어질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러비는 장기적으로 국제사회는 달러의 대안을 모색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달러 가치의 지속적인 하락과 세계 경제의 구조적인 변동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일찍이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을 예견해온 세계체제론자 임마뉴엘 월러스타인은 "관건은 미국 패권주의의 쇠퇴 여부가 아니라 패권주의의 몰락으로 인해 미국과 국제사회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는데 있다"고 말해왔다. 이제 세계는 '미국을 어떻게 연착륙시킬 것인가'라는 피할 수 없는 질문에 봉착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정욱식 기자는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로 일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정욱식 기자는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로 일하고 있습니다.
#달러 #패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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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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