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미선씨가 수감되었던 샌디에이고 소재 CCA 구치소
San Diego Indymedia
5번 프리웨이는 미국의 서부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고속도로이다.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에 거주하던 한인 박석주씨가 아내 최미선씨와 함께 5번 프리웨이를 타고 남쪽 샌디에이고 지역으로 짧은 여행길에 오른 것은 지난 7월 31일.
이들 부부는 자신들의 토요타 캠리 자동차 안에서 10여 년간의 이민 세월을 회상하며 샌디에이고의 아름다운 절경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둘 사이의 대화가 이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며 오가던 사이 운전석에 앉아 있던 박씨는 프리웨이에 걸려 있는 멕시코라는 신호판을 보았다.
순간 박씨는 "이런! 큰일 나겠구나"라고 말하면서 프리웨이의 안내 표시판을 따라 도로 오른쪽에 있는 출구 레인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박씨가 택한 것은 입국 검사대 앞에서 U-턴하는 레인이 아니라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을 넘어 다시 미국 영토로 들어오는 레인이었다.
흔히 프리웨이의 출구는 도로 오른쪽에 있기 마련이기에 박씨는 오른쪽 출구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씨와 아내 최미선씨가 결국 밟은 땅은 멕시코였고 미국이라는 표시판을 따라 조금 더 운전한 그들 부부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미국 입국 검사대였다.
박씨는 1994년에 입국해 1998년에 영주권을 취득하였으나 아내 최미선씨는 방문 비자로 입국하여 학생 비자로 전환했다가 박씨를 만날 즈음부터 서류미비자, 이른바 '불법 체류자'로 살아왔다.
입국 검사대에서 박씨는 영주권 미소지로 벌금을 부여받았으나 아내는 체류 신분을 증명할 그 어떠한 서류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결국 아내 최씨는 합법적인 입국 서류를 지니지 않은 채 입국을 시도한 '밀입국'으로 간주됐고 보석 재판도 없이 샌디에이고에 있는 구치소에 수감됐다.
아내의 추방 앞에 접은 13년 '아메리칸 드림'... 거세지는 반이민 정책 박씨를 만난 것은 지난 8월 22일. 박씨는 주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뿐만 아니라 이민 변호사도 만나 보았으나 아내를 석방시킬 방도를 찾지 못하고 거의 포기 상태에 접어들어 있었다. 박씨가 보여준 것은 아내의 수감번호(
88725043)가 적혀 있는 작은 종이 한 장.
박씨에 의하면 아내는 밀입국이라는 이유로 8월 30일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추방될 예정이었다. 아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던 박씨 역시 한국 시간으로 8월 31일 5시 30분 인천국제공항에 아내보다 먼저 도착해 아내를 맞이할 계획이라고 밝히면서 끝내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11월 5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인터넷판에 의하면 최근 급증하고 있는 이민 단속으로 인해 미 전역에 걸쳐 이민 구치소 수감자의 숫자는 거의 폭발 직전의 상황이다.
이민 구치소에 하루 평균 구금되어 있는 서류미비자 숫자는 전국적으로 3만명을 초과하고 있으며 캘리포니아 지역에만 한정하더라도 4천명을 넘어서고 있다. 또한 2006 회계년도에는 총 17만7천명이 추방되었으나 2007 회계년도의 경우에는 무려 26만1천명이 추방당한 것으로 조사됐다.
서류미비자 추방 사례의 급증은 무엇보다도 전국적인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아래로부터의, 그리고 위로부터의 반(反)이민 움직임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지난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포괄적 이민개혁안, 즉 백악관과 연방 상원 지도부가 5월 17일 합의한 '포인트제 이민법안'의 좌초는 이민을 반대하는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사실 5·17 합의안은 1965년 이후 미국 이민법의 주요 흐름이었던 '가족 초청 이민 제도'를 대폭 제한하고, 이민 희망자의 학력과 기술에 포인트를 매김으로써 일차적으로 숙련 기술직 보유자에게 이민의 문호를 개방하겠다는, 따라서 인도주의적인 가족 재결합 프로그램 대신 숙련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자본의 요구를 반영하는 개혁안이 아닌 개악안의 측면을 다분히 지니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5·17 합의안은 이민권익단체 등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Z비자'를 신설함으로써 서류미비자를 대폭 사면하겠다는 합의안 내용은 반(反)이민 세력들의 준동을 불러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바로 이들의 이민개혁안 반대 캠페인 결과, 즉 연방 상원 의원 전화 걸기 캠페인을 비롯해 그들식의 거칠고 집요한 반(反)이민 풀뿌리 운동의 결과, 그다지 개혁안이라고 볼 수도 없는 5·17 합의안은 끝내 좌초하고 말았던 것이다.
미국의 반(反)이민 움직임은 단순히 아래로부터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8월 10일 국토안보부의 마이클 처토프 장관은 서류미비자를 고용하는 업주를 처벌함으로써 불법 이민을 근절하겠다는 단속안을 발표한 바 있는데 이는 위로부터 전개되는 반(反)이민 움직임의 좋은 예이다.
흔히 서류미비자는 합법적인 세금 보고를 할 수 없기에 현금으로 월급을 받거나 타인의 사회보장번호를 이용해 세금 보고를 하고 월급을 받는 것이 대부분이다.
국토안보부는 이럴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연방사회보장국(Social Security Administration) 정보의 불일치를 근거로 고용인의 사회보장번호가 의심스럽다고 판단되는 업체에 이른바 'No Match Letter'를 발송하고 이 레터를 받은 후 90일 이내에 불일치를 해결하지 않는 고용주를 처벌하겠다는 강력한 단속안을 세운 것이다.
다행히도 국토안보부의 단속안은 이민권익단체의 소송 결과 현재 샌프란시스코 소재 연방법원으로부터 예비 정지 명령을 받은 상태이다. 하지만 'No Match Letter' 단속안은 서류미비 이민자들의 삶을 황폐화시키고도 남는 위로부터의 반(反)이민 정서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