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당서> 측천황후 본기
대만 중앙연구원
이에 따르면, 중종 원년(705)에 성신황제(측천무후)를 몰아낸 중종 세력은 그에게 측천대성황제라는 존호를 부여했다. 이때는 측천무후의 사망 10개월 전이었다. 측천대성황제라는 존호는 생전에 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사망 10개월 전에 받은 것인데다가 이후의 시호에서도 유사한 표현이 계속 사용되었으므로 사실상 시호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 사망하기 직전에 그는 자신의 존호에서 ‘황제’라는 표현을 삭제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의 사후에 이 요청에 따라 ‘측천대성황후’라는 시호가 다시 부여되었다. 이 내용은 위 사료의 뒷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구당서> 측천황후 본기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측천무후가 측천이라고 불린 것은 사망 10개월 전부터였다. 이 시점은 그가 이미 권력에서 쫓겨난 뒤였다. 그리고 후대의 역사가들이 이 존호를 기준으로 역사를 기술했기 때문에, 이후에 측천이라는 존호가 널리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측천무후의 전성기가 그려지고 있는 현재의 <대조영>에서, 대조영이나 묵철 등이 생전의 측천무후를 ‘측천’이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다. 그가 측천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나중의 일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대조영>의 이 같은 실수는, 마치 이순신을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이 생전의 이순신을 ‘충무공’이라고 부르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또 세종 임금을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이 생전의 세종 임금을 ‘세종’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드라마 해설자가 해설 중에 측천·충무공·세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조영>처럼 드라마 속의 등장인물들이 생전의 성신황제(측천무후)를 상대로 사실상의 시호나 마찬가지인 측천을 거명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일 것이다.
이는 드라마 <대조영>이 중국측 사료를 충분히 고증하지 않은 데에서 비롯된 실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국측 사료에 접근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측천무후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드라마의 각본을 쓰면서 <구당서> 측천황후 본기도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순신을 소재로 한 드라마의 각본을 쓰면서, 사전에 <난중일기>를 확인하지 않는 것과도 똑같은 일이다.
최근 들어 시청자들이 역사 드라마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에, 역사 드라마의 작가들은 더욱 더 고증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드라마는 픽션이라고 하지만, 역사 드라마의 경우에는 핵심적 사실관계에 관한 한 픽션이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시청자들은 역사 드라마를 실제 역사로 오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 드라마 작가도 역사가에 준하는 일정 정도의 고증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 드라마 작가에게 주어진 ‘고증으로부터의 자유’는 핵심적 사실관계와 무관한 영역에 국한되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