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산성 풍경부모산성과 정상의 통신탑
변종만
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발굴과 보수가 이뤄지고 있는 북문 및 수구부 일원이다. 언덕에 오르면 미호평야와 오창과학단지, 청주역과 옥산의 동림산, 오송생명과학단지 현장과 강내가 눈앞에 펼쳐진다. 성곽을 따라가며 성을 쌓았던 돌들이 역사의 파편처럼 흩어져 있어 발굴이 뒤늦게 이뤄졌음을 알게 한다.
2002년 충북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된 길이 1135m의 부모산성은 석축 산성으로 성벽의 윗부분은 많이 무너졌으나 기저부는 온전히 남아 있다. 중부 이남지역에서 처음 발견된 보축 성벽으로 현재 발굴이 진행되고 있어 사적이 될 확률이 높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5권에 '청주 서쪽 15리에 둘레 2427척의 석축산성이 있고 가물 때에 성안에 있는 큰 연못에 기우제를 지내며 지금은 폐성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대동여지도에 청주의 서쪽 산성으로 크게 점 찍혀 있다는 것으로 봐 큰 연못이 있었을 만큼 청주지역에서 중요한 산성이다.
갈림길 위로 송신탑이 서있는 정상이 보이는데 그곳에 있는 모유정은 출입할 수 없다. 갈림길의 쉼터에서 사창동 주민센터에서 제공한 두부를 안주로 동동주도 마셨다. 우리 가락 좋을시고 부모산에 울려 퍼진 판소리는 소화제였다.
사창동 주민들과 부모산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아양산, 악양산, 아미산'으로 불리다가 부모산이 된데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부모산은 항상 안개가 끼어 있어 적을 피해 숨어있기에 좋은 장소였다. 고려 말기 몽고군이 침입하자 고을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 와 적의 공격과 노략질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오랫동안 고립된 생활을 하는 바람에 성안의 식량과 물이 떨어져 사람과 말이 목말라 죽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성안에서 샘물이 솟아나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기에 그 은혜가 부모와 같다 해서 부모산이라고 했다.
또 하나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빼앗은 화천당 박춘무(1544~1611)에 관한 얘기다. 박춘무와 의병들이 이곳에 머물고 있을 때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산에 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산을 포위해 식량과 물의 보급을 차단했다. 보름을 넘기자 아사자가 속출했고 박춘무도 산기슭 큰 소나무 밑에 쓰러졌다.
이때 지팡이를 짚은 백발노인이 나타나 의식이 희미한 박춘무를 깨운 후 머리맡에 있는 소나무를 가리켰다. 군사들에게 소나무를 뽑게 하자 식수는 물론 말을 목욕시킬 정도로 많은 양의 물이 솟구쳐 나왔다. 군사들은 용기백배 사기가 올랐고 이 사실을 안 왜병들은 북쪽으로 도망쳤다.
죽어가는 병사들에게 물을 내린 것이 자식을 돌보고 음식을 주는 어버이의 은혜와 같아 부모산으로 부르며 제단을 쌓아 산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박춘무가 백발노인의 계시를 받아 판 우물은 어머니의 젖과 같다하여 모유정(母乳井)이라고 했다.
한편 풀무처럼 생긴 산, 풀무가 있는 산으로 해석해 풀무가 불무와 불모의 변형과정을 거쳐 부모산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거나 본래 이름인 아양산(我養山)도 아비 야(爺)와 어미 양(孃)을 쓴 부모산의 이음동의어인 야양산(爺孃山)이라는 견해도 있다.
부모산의 영험 때문일까? 이곳 사람들은 6.25 등 전쟁시의 인평피해, 폭우나 우박 등의 자연재해, 산짐승의 농작물 피해가 다른 곳보다 적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