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서원우암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해 노론이 주도해 설립
양태석
16세기 후반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서원은 고려말 조선 초에 존재하던 서재의 전통을 잇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재의 성격이 단순히 유자의 안거강학(安居講學)의 장소였던 데 반해 서원은 안거강학의 기능뿐만 아니라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祀廟)를 가지고 있었으며 엄격한 학규에 의해 운영되는 특징을 가졌다. 서원은 지방 사림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나아가 중앙 정치세력의 제지 기반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서원의 설립은 대체로 후손과 문인을 포함한 일향 사림들의 주관하에 이루어졌는데, 화양서원은 1695년(숙종 21)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을 제향하기 위해 권상하(權尙夏)·정호(鄭澔) 등 노론이 주도해 설립했으며, 다음해 사액(賜額)을 받았다.
화양서원은 송시열이 은거하던 장소에 세운 서원으로 노론집권기에 국가로부터 많은 토지와 노비를 받는 등 송시열을 제향한 전국 44개 서원 가운데 위세가 가장 큰 서원이었다. 그러나 화양서원의 권세가 막강하여짐에 따라 백성의 폐해도 커졌다.
제수전(祭需錢) 명목으로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행 군, 현에서 강제로 돈을 걷거나, 춘추제향(春秋祭享)을 지낸 뒤 원임(院任)들에게 치번(致膰)을 제공한다는 목적으로 복주촌(福酒村)과 복주호(福酒戶)를 운영하고, 요역을 피하려는 부민(富民)으로부터 돈을 받고 피역(避役)시켜 부민이 지던 역을 가난한 백성이 대신 떠맡게 하는 폐단을 일으킨 것이다.
이쯤 되면 서원의 기능이 변질하여 교육기구라기보다는 많은 사람의 원성의 대상이 되는 기구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서원의 문란에 제동을 건 것이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조치였으니 그동안 근 이백여년 동안 화양서원은 백성에게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는 집단으로 두려움의 존재였을 것 같다.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며 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척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고 또한, 예론(禮論)에도 밝았기에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기도 한 우암 송시열, 그는 저승에서 사회로부터 지탄받아 철폐되는 화양서원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