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조선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이정근
세자 폐위 후속 조치를 착착 진행하던 태종은 폐 세자 이제를 양녕대군으로 봉하고 세자 충녕에게 관교(官敎)를 내려주었다. 또한, 충녕의 부인 심씨를 경빈으로 봉(封)했다. 심온의 딸이 세자빈이 된 것이다.
청성백 심덕부의 아들로 태어나 이조판서 직에 있던 심온. 딸이 세자빈이 된 가문의 영광이 죽음이 될 것이라는 것은 자신은 물론 아무도 몰랐다.
이어 인사 조치를 단행했다. 유정현을 영돈녕부사로 보내고 한상경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세자 축출 작업에 총대를 멘 유정현을 쉬게 한 것이다. 예문관 대제학이던 변계량을 예조판서로, 김여지를 판한성부사로 내렸다. 문책성 인사다.
서연청도 확대 보강했다. 좌의정 박은을 세자사(世子師)로 삼고, 옥천부원군 유창을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임명하는 한편 유관을 예문관대제학 겸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맹사성을 공조판서 겸 세자우빈객으로 삼았다. 좌빈객은 변계량이 있던 자리다. 맹사성의 세자우빈객 임명으로 세종시대를 열어갈 떠오르는 샛별이 등장한 것이다.
태종으로부터 폐 세자 양녕을 광주에 안치하라는 특명을 받은 일단의 무리들이 한양에 입성했다. 세자전을 접수하기 위해서다. 총책 문귀를 앞세우고 서전문을 통과한 일행은 창을 꼬나쥔 군사들을 앞세우고 운종가를 행진했다. 때아닌 군사들의 출현에 도성의 백성들이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수군거렸다.
"아들 쫓아내면서 웬 군사들이야?"
"그러게 말이야, 폐 세자가 무슨 힘이 있다고, 꼭 점령군 같아…."
첨총제(僉摠制) 원윤이 지휘하는 군사들이 세자전으로 들이닥쳤다. 놀란 부녀자와 아이들이 울부짖으며 우왕좌왕했다. 군사들은 창을 앞세우고 눈알을 부라렸다. 살벌했다. 겁에 질린 이들을 세자빈 거처로 몰아넣어 라고 원윤이 소리를 질렀다. 군사들이 닭 몰이하듯 가속들을 숙빈 거처로 몰아넣었다. 세자전 뜰에 양녕 혼자 부복했다. 문귀가 목에 힘을 주며 전교(傳敎)했다.
귀에 쏙 들어오는 말, “네가 사랑하던 여자들을 모두 거느리고 살라”"너로 하여금 새사람이 되도록 바랐는데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백관들이 너를 폐(廢)하자고 청했기 때문에 부득이 이에 따랐으니 너는 그리 알라. 네가 옛날에 나에게 고(告)하기를 '나는 자리를 사양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는데 내가 불가(不可)하다고 대답하였다. 이제 너의 자리를 사양하는 것은 네가 평소에 바라던 바이다.
효령대군은 바탕이 나약하나 충녕대군은 고명(高明)하기 때문에 내가 백관의 청으로 세자를 삼았다. 군신(群臣)이 모두 너를 먼 지방에 안치하도록 청하였으나 중궁이 가까운데 두기를 원하여 너를 광주에 안치하는 것이다. 비자(婢子)는 13구를 거느리되 네가 사랑하던 자들을 모두 거느리고 살라. 노자(奴子)는 장차 적당히 헤아려서 다시 보내겠다. 전(殿) 안의 비품은 모조리 다 가지고 가도 무방하나 네가 가졌던 탄궁(彈弓)은 전(殿)에 두라." - <태종실록>전교가 끝났다. '탄궁을 두고 가라'는 말은 까칠하게 들렸고 '네가 사랑하던 자들은 모두 거느리고 살라'는 말은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렇다면 부왕께서 어리를 허락하셨단 말인가?' 뛸 듯이 기뻤다. 하마터면 기쁨의 미소를 흘릴 뻔했다.
'부왕에게 죄를 짓고 귀양 가는 몸. 아무리 좋아도 표정관리를 해야 한다.' 스스로 다짐한 양녕은 매무새를 고치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엎드려 있던 양녕이 머리를 들었다.
"옛날에 사양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다가 금일에 죄를 얻었다."
말을 마친 양녕은 북쪽을 향하여 삼배(三拜)를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좌우를 휘둘러 본 양녕은 미련 없이 세자전을 떠났다. 숙빈과 가속들이 뒤를 따랐다. 문 밖에서는 인의가 말을 대기하고 있었다. 말에 오른 양녕은 앞으로 나아갔다. 창을 든 군사들이 앞뒤를 에워쌌다. 호위가 아니라 호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