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릎이 아픈 경씨는 낮에 지하보도에서 떡을 판다
성재민
젊음이 넘치는 거리, 전북대학교 앞. 496개 상점들이 밀집해 있는 이 곳은 낮에는 학생들이 활동하는 거리지만, 저녁이 되면 술 한 잔을 찾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유흥의 거리로 변한다.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은 웃고, 반가워하고, 얼큰하게 취한 모습들이다. 마냥 즐거워만 보이는 사람들로 넘치는 이 거리에 세상사에 대한 근심 걱정은 없어 보인다. 단 한사람만 빼고.
'근심 걱정'의 주인공은 바로 경문자(73)씨. '떡 할머니'로 더 유명한 경씨는 매일 이 거리에 나타난다. 전북대 앞에서 술 한 잔 걸쳐 본 사람이라면 그를 모르는 이가 없다.
경씨는 매일 떡과 도너츠가 든, 무거워 보이는 갈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말한다. "학생, 떡 하나만 팔아줘."
경씨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다. 그에 대한 오해만 낳은 근거없는 소문들.
"그 할머니 밤 되면 외제차 타고 다닌대."
"사실은 익산에 빌딩 한 채 갖고 있다던데?"
"그 할머니 그렇게 떡 잘 파니까 돈 엄청 잘 벌 것 같지 않냐?" 42년째 떡장사... "학생, 하나만 팔아줘""내가 31살 때부터 이 일을 시작했어. 내 나이가 지금 73살이야."
햇수로 42년째다. 현재 전미동에 살고 있는 경씨는 오전 8시에 집에서 나온다. 남부시장에 들러 떡을 사고 전북대 앞에 와서 장사를 시작한다. 이 때가 보통 오전 9시다. 오랫동안 장사를 한 탓에 무릎이 아파 낮에는 지하보도에서 팔고, 어떻게든 떡을 다 팔아야 하기에 저녁부터 새벽 늦게까지 학교 앞 술집을 돌아다니며 판다.
"생활력이 없는 남편 때문에 시작했어. 내가 오죽 힘들었으면 이 일을 여태까지 하고 있겠어?"
젊은 시절부터 힘든 일만 했다. 처음엔 돈을 벌 능력이 안 됐던 남편을 대신해 일을 시작했다. 그가 아니면 돈을 벌 사람이 없었기에 31살 젊은 나이에 하루 종일 돌아다녀야만 하는 이 일을 시작했다.
그래도 자식들이 성장하면 그만 둘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자식들이 성장한 후에도 그만둘 수 없었다.
"할머니 왜 이렇게 일을 오래 하세요? 자식들이 다 성장했을 거 아니에요."
갑자기 경씨의 눈이 슬퍼지기 시작했다. 주름 속에 가려진 눈이 또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묻어났다. 그는 슬하에 2남3녀를 두었지만 아픔이 많았다. 세 딸들은 다 시집가서 잘 살고 있지만 두 아들은 아픈 상처를 가졌다.
"작은놈 죽고나서 나도 죽을라고 했었어, 근데 못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