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듬이질 풍경(한밭교육박물관 모형).
안병기
추억 속으로 사라져간 정다운 다듬이 소리 현대 문명은 세상에 없던 수많은 소리를 탄생시켰다. 비행기가 뜨고 앉을 때 내는 굉음과 자동차의 경적 등이 바로 그것이다. 문명이 낳은 소리들은 예외없이 대부분이 불협화음이다. 이 파열음이 닿는 순간, 귓속의 달팽이관은 부르르 진저리를 친다.
이렇게 귀에 거슬리는 불협화음을 수없이 탄생시킨 문명은 그만큼 많은 소리를 세월 밖으로 추방했다. 소달구지 소리, 도리깨질 소리, 상엿소리, 다듬이 소리 등이 그것이다. 특히 깊어가는 가을에 듣는 다듬이 소리는 듣는 이의 가슴을 흔들어 묘한 무늬를 만들곤 했다. 완벽한 음악적 구조를 갖춘 아름다운 소리였다. 어렸을 때, 난 이 다듬이 소릴 아주 좋아했다.
해거름이면 할머니는 약간 덜 마른빨래를 걷어 오신다. 빨래의 솔기를 펴고 너덜너덜한 실밥을 뜯어내고 나서 네 귀를 맞춰 둘로 접으신다. 그리고 막내 고모를 불러내어 빨래의 한 쪽을 잡게 한 후 양쪽에서 팽팽하게 힘을 주어 살살 잡아당기신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고모가 세게 힘을 주어 당겨 버리면 할머니는 뒤로 벌러덩 넘어지고 만다. 어느 한순간 할머니가 빨래를 놓치시면 이번엔 고모의 윗몸이 앞으로 쏠려 넘어진다.
이런 과정을 몇 차례 되풀이하고 나서 할머니는 빨래를 다시 귀가 딱 맞게 접어 옥양목 보자기에 싸서 두 발로 자근자근 밟는다. 그러다 보면 구김이 서서히 펴진다. 할머니는 이윽고 쪽마루에 있는 다듬이 위에다 빨래를 올려놓는다. 그런 다음 할머니와 고모는 서로 마주보고 앉아 다듬이를 두들기기 시작한다.
처음 자진모리로 시작된 다듬이 소리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중중모리로 느려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휘모리로 바뀌어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그렇게 적멸을 가르며 점점이 태어난 소리들은 가을밤의 허공을 흔들어 깨우고, 그 울림이 만드는 동심원은 점점 넓어져 내 마음 깊은 곳에까지 와 닿는다. 난 어쩐지 다듬이 소리가 만드는 평화가 좋았다.
또닥또닥 또닥또닥 또닥 딱딱딱 따다닥 딱딱딱딱…. 다듬이 소리에 따라 방안의 호롱불이 고요히 흔들린다. 그럴 때면 행여라도 호롱불이 꺼질까 봐 난 가슴이 조마조마하곤 했다. 어린 나이지만 어쩌면 그 스릴과 서스펜스를 즐겼는지도 모른다.
내 유년의 추억 속에서 떠오르는 가장 정겨운 소리의 하나인 다듬이 소리. '또닥또닥'이란 다듬이 소릴 나타내는 의성어 속에는 우리 어머니의 들숨과 날숨이 묻어 있다. 멀어질 듯 가까워지고 가까워질 듯 멀어지는 투박하고 경쾌한 그 소리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겪은 가장 원초적 모음(母音)이었다.
'또닥또닥'. 이 평화스런 의성어는 사람의 마음속 상처를 달래고 보듬어 줄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다듬이 소리는 단순히 옷의 주름을 펴는 소리에 머물지 않고 삶의 구김살까지 펴주는 신명나는 소리인 것이다. '또닥또닥'은 또한 아이를 어루는 의성어이기도 하다. 아기에게 엄마가 네 옆에 있으니 안심하고 자라는 수신호이기도 한 것이다.
시의 소재로 즐겨 썼던 다듬이 소리예로부터 우리나라 시인들은 물론 백거이 등 중국 시인들도 다듬이 소리를 시의 소재로 즐겨 썼다. 또 한국 고가 연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고 양주동 박사(1903. 6. 24~1977)는 1938년에 나온 <현대조선문학전집 시가집>에 실린 시에서 "피마자 등불조차 / 가물가물 조을고 있을 이 밤중인데 / 안악네들 얼마나 눈이 감기고 팔이 아플가 / 아즉도 도드락 소리는 그냥 들리네"(시 '추야장이수' 일부)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