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개한 하천과 주변의 잔디
이대수
인천공항에서 파리를 경유해 출발 하루만인 9월 14일 저녁 빌바오 공항을 거쳐 15-18일 스페인북부 인구 270만의 바스크 자치주 기푸스코아 지방의 혼드리바 유스호스텔에서 개최된 GAIA(세계 반소각/소각대안연맹) 2007년 세계 대회 참석 후 하루 시간을 내서 몬드라곤을 방문하게 되었다.
한국을 출발하기 몬드라곤협동조합복합체 홈페이지(
www.mondragon.mcc.es)에서 자료를 살펴보기는 했지만 그룹연수 위주의 사전 방문신청이라 사전 요청 없이 그냥 배짱으로 출발했다. 출발 전에 인터넷을 통해 그리고 몬드라곤을 방문했거나 방문했음직한 분들께 사전 정보를 얻으려고 했지만 너무 오래되었거나 구체적인 정보를 얻기는 어려웠다. 장님 코끼리 더듬는 듯한 수준일 수 있지만 이런 방문기회도 별로 없는 것 같아 방문기를 소개한다.
유스호스텔에서 행사를 마치고 9월 19일 아침 일찍 어둠을 뒤로 하고 배낭을 챙겨 시내로 내려갔다. 스페인 환경운동 활동가가 가르쳐 준대로 시내버스를 타고 산세바스티안으로 향했다. 1시간을 달리다가 도노스티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근처에 있는 매표소에서 7.6유로 버스표를 구입하고 오전 9시 발 사라사테/몬드라곤행 시외버스를 타니 승객은 3명뿐이다.
뒷좌석에 앉은 젊은 여성에게 MCC에 대해 물으니 산자락에 있다는 설명을 해 준다. 한참을 달리며 산길임을 실감하는데 MCC 소속 에로스키 생활협동조합 대형매장이 보이면서 10시 조금 지나 도착하니 작은 도시인데 여기저기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눈에 뜨이는 여행사를 찾아 길을 물으며 가다가 자그마한 아라사테 호텔에 들러 2002년판 몬드라곤 지도를 구해서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물으니 깔깔거리면서 단편적인 길안내를 한다.
애들은 역시 애들이야! 마침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이 유창한 영어로 같은 방향을 걸으면서 길안내를 해 준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길을 걷다보니 하천을 복개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한 토막을 걷어내고 정원처럼 나무와 잔디를 심고 주변에 벤치가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해 사람들이 쉽게 하천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하천을 복개하는데 참고할 만하다.
길이 갈라지는 로터리 가운데 서 있는 기계 톱니가 공업지역임을 보여준다. 울산시내로 들어가는 로터리 풍경과 흡사하다. 로터리 정면에 있는 주상 복합고층 아파트에 붙어 있는 MCC(Mondragon Corporacion Cooperative) 마크가 눈에 들어오는데 여간 반갑지 않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니 영어를 가르치는 초보 수준의 그림 판넬이 붙어 있는 것이 마치 영어학원 같다. 인구 2만5천명의 몬드라곤에서 처음 만나는 MCC 이미지다. 영어 붐이 한창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시 계속 산자락으로 길을 찾아가니 노인들이 정류장에 앉아 담소를 즐기고 투명한 정류장 벽과 거리의 벽에는 각종 포스터가 붙어 있다. 얼굴을 보자기로 씌운 결박된 나체 남성포로의 사진 등이 담긴 포스터인데 이라크 포로 학대 사진으로도 보이고 바스크 분리주의에 대한 탄압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다. 한 장을 떼어서 챙겼다.
파고르(울고의 변경명칭) 연구소가 눈에 들어온다. 길을 찾다가 점심시간이 가까워서 봐 두었던 동방용(몬드라곤은 용산이라는 뜻이다)이라는 중국집에서 혼자 이른 점심을 먹었다. 슈퍼마켓에 들러 짐을 맡기는 코너에서 큰 배낭을 열쇠고리에 걸어두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중에 며칠 후 귀국길에 빌바오 공항을 다니는 버스에 마주 앉은 젊은 부부에게 바스크 지방 분리독립 문제를 물어 봤더니 여론상 반반이라고 하며 자신들은 찬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협곡에 자리 잡은 몬드라곤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하천을 살펴보니 대부분 바닥은 콘크리트화 되어 있었다. 몇 시간을 돌아다니면서 느낀 점은 아이들이 많이 보였다는 것이다.
낮 시간이라 엄마들이 학교와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데리러 오는 모습, 그리고 할아버지(할머니가 아니었다!)가 손주를 유모차에 태워 거리를 다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실제로 2006년 보고서에서도 지난 10년간 일자리가 거의 3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산을 깎아 도로를 내거나 아파트를 짓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대부분의 기존 아파트가 5층 정도였고 새로 지어진 아파트는 10층 내외였다. 도시의 활력이 느껴졌다. 지방이 쇠락해 가는 모습을 겪고 있는 한국의 모습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다시 길을 물어서 되돌아 가다보니 언덕 입구에 그림표지판이 나오고 이어서 MCC 본부와 이켈란 기술연구소 노동인민금고 건물이 보인다. 먼저 이켈란 기술연구소 건물에 들어가니 호세 마리아 아르멘디아리에타 신부의 흉상이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것 아닌가. 무척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