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허웬에 전시된 서태후의 초상화.
김종성
금년 들어 보수적인 한국인들 사이에서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지도자의 금전적 부도덕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서유럽의 정치상황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사회가 발전할수록 보수층에서는 지도자의 도덕성에 대해 점점 더 엄격해지는 법이다. 자기 자신은 방탕하게 살지라도 지도자만큼은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올해 들어 보수적인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지도자의 축재 과정을 문제 삼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도자의 과거 축재 과정을 애써 덮어두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 어떻게 돈을 벌었든 간에 자신과 정치적 코드만 같으면 된다는, 매우 무책임한 태도가 보수층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지도자의 금전적 도덕성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사실은, 서태후(1835~1908년)의 탐욕과 부정부패가 청나라 멸망의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서태후는 측천무후와 함께 중국사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여걸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청나라 말기의 40여 년 동안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동치제(재위 1861~1874년, 서태후의 아들) 및 광서제(재위 1874~1908년, 서태후의 조카)의 재위기간 동안 그는 섭정으로서 중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그런데 통치자의 자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서태후는 이전의 통치자들에 비해 상당히 뒤떨어지는 인물이었다. 역사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한민족이나 중국의 왕조에서는 세자나 태자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이 존재했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 세자·태자는 지도자로서의 덕목을 기를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차기 지도자는 사람을 대하는 법, 재물을 대하는 법 등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후궁 출신인 서태후는 이런 교육에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는 지도자의 덕목을 갖추지도 못한 상태에서 청나라의 최고 대권에 다가서게 되었다. 물론 황족 출신이 아니더라도 혁명가들처럼 궁궐 밖에서도 얼마든지 지도자의 덕목을 갖출 수 있었겠지만, 서태후는 그나마 그런 ‘자습’의 기회도 갖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갑작스레 불어난 ‘재물에의 접근 기회’ 앞에서 도덕적 중용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갖고 싶은 것들 앞에서 스스로를 자제할 수 없었다. 그는 지나치게 돈을 밝혔고, 또 자신에게 뇌물을 바치는 관료에게 특히 각별했다.
서태후가 얼마나 돈을 밝혔으며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생생히 보여주는 실례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베이징 서북부에 있는 이허웬(이화원)이라는 곳이다. 12세기에 처음 만들어진 이곳은 나중에 서태후의 별장으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둘레가 8킬로미터나 되는 이허웬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쿤밍호(곤명호)라는 대형 호수다. 일본이 자국을 쓰러뜨리기 위해 군비를 은밀히 그리고 착실히 증강하던 시기에, 쿤밍호에서 한가하게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서태후의 모습을 상상해보라.